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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본 ‘The 33'이란 영화는 희망의 드라마였다. 


2010년 8월 칠레의 산호세 구리 광산에서 붕괴사고가 일어나 지하 700미터 지점 갱도에 광부 33명이 갇히게 되었다. 


생존확률은 2%에 불과했다. 


그러나 69일 만에 그들은 기적적으로 모두 살아서 죽음의 갱도를 빠져나오는데 성공하는 스토리였다.


붕괴직후 갱도 안의 임시 대피소에 모여든 33명의 광부들에겐 물 20리터, 우유 16리터, 복숭아 통조림 1개, 완두콩 통조림 2개, 연어 통조림 1개, 참치 통조림 20개, 강낭콩 통조림 4개, 크래커 96통이 전부였다. 


광부 열 명이 마흔여덟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식량에 불과했다.


광부들은 성난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고 서서히 극한상황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를 ‘서른네번째 광부’라고 부르며 기도했다. 참치 한 스푼과 우유나 주스 반 잔, 크래커 한 개, 비록 빈약한 식사지만 서른세 명 모두가 음식을 배급받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동시에 허기를 달랬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식량은 빠르게 줄어갔다. 광부 가족들은 하나 둘 광산으로 몰려들어 텐트를 쳤다. 이름은 ‘희망 캠프’였다.


세계 언론은 끊임없이 희망 캠프로 몰려들었고 등록된 기자의 수만 2천 명을 넘어섰다.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그들은 결국 피닉스(불사조)란 캡슐을 타고 한명 한명 구조되었다. 거짓말 같은 생존드라마였다.


69일을 버티는 동안 그들의 팀워크는 감동과 경탄의 대상이 되었다. 


폭력과 이기주의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33인은 땅속에 갇힌 동안 형제애로 하나가 된 노동계급의 영웅들로 추앙받게 되었다. 


영화는 다튜멘타리 비슷해서였는지 흥행엔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이들 광부들의 생존드라마인 ‘더 33’이 지난 성탄계절에 선물한 메시지는 ‘희망’이었다. 

죽음의 대기실에 머물던 그들은 희망하나 붙들고 때론 오줌을 마시기도 했고 절망적인 굶주림을 참아내며 몸에 피어나는 곰팡이와 싸울 수 있었다.


2016년 새해를 맞이한 기독교, 대내외적으로 우울하기만 하다. 


그래도 천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낮은 곳으로 임하는’ 파격행보 때문에 그래도 덜하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1년 앞둔 개신교는 딱히 치고 나갈 희망의 구멍이 보이질 않는다. 


동성결혼 합법화의 회오리바람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교회의 대 사회적 위상은 계속 추락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교회에서 씨가 말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는 노인전용관처럼 굳어질까 두렵다. 


유아세례도 사라지고 ‘가나안 성도’는 보란 듯이 증가일변도다. 그 좋다던 양육, 전도, 영성, 성경공부 프로그램들은 모두 교회 밖으로 추방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포기할 것인가? 


바울을 바라보자.


 2차 전도여행 때 아테네에 도착한 그는 유명한 아레오바고 설교를 통해 희랍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아테네는 플라톤의 이상주의, 에피쿠로스의 향락주의,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가 판을 치던 철학의 도시였다. 


바울 역시 알아주는 학자였다고는 하지만 아테네에 비하면 촌뜨기였다. 


그가 전파하는 생전 듣도 보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뉴스는 철학과 신화의 도시 아테네에겐 쪽팔리는 헛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온갖 철학과 미신과 우상들이 파르테논 신전의 거대한 돌기둥이 되어 왜소하고 초라한 바울을 위협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러나 겁먹지 않았다. 포기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담대하게 외친 것이다. 

왜? 그에겐 예수만이 절대희망이었다. 


그 분을 전파하는 것이 불꽃같은 그의 희망이었다. 아레오바고 설교는 이방인에게 전한 최초의 설교가 되었다. 


그 설교 덕에 우리도 예수를 영접한 셈이다.


 앞이 캄캄하고 답답한 경우를 바울이 어디 한 두 번 당했을까? “죽기야 하랴?”는 식으로 덤비는 그의 용기 앞에 언제나 길은 열렸다. 


그래서 로마에 까지 이른 것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길은 열린다. 


내가 요즘 재미있게 보는 한국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씩씩한 전교 꼴등 성덕선이란 여고생이 재학하는 서울 도봉구 쌍문여고의 급훈이 사람을 웃긴다. 


‘포기는 배추를 세는데 쓰는 말이다.’ 포기하지 말라는 조크의 말씀이다.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고전적 일화중 하나가 윈스턴 처칠의 옥스퍼드 졸업축사다. 


말주변이 없던 것으로 소문나 있던 처칠이 수상이 된 후 옥스퍼드 대학교의 졸업식 연사로 초청받았다. 


단상에 올라 단 세마디를 하고 내려왔다. "You, Never give up!" 한 참 있다 또 “You, Never give up!" 그리고 또 한참 후에도 “You, Never give up!이었다. 앞길이 어두워도 포기하지는 말자. 


그럼 2016년은 희망의 해가 된다. 


69일 만에 희망하나 붙잡고 죽음의 갱도에서 살아나온 33명의 광부들도 있다. 


내 인생은 희망의 로켓처럼, 우리 가정은 희망캠프, 우리들의 교회는 희망열차, 우리들의 직장은 희망의 동산이 되게 하자.


밝아온 새해에도 주님이 희망이다. 희망이 없는 자는 인생도 아니다. 


소금에 저린 포기배추에 불과하다.


<크리스찬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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