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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의 아테네’라고 불리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는 도시 어느 곳에서나 쉽게 눈에 띄는 기념비 하나가 서 있다.  이 나라의 대문호 월터 스콧 기념비다. 고딕건축양식을 따라 사암으로 건축된 시커먼 기념탑.  


계단으로 오르면 287 계단을 올라야 하고 높이는 61미터.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서 있는 넬슨 제독의 기념비보다 일부러 5미터 높였다고 한다. 


같은 연합왕국(UK)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앙숙관계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쟁심을 말해주는 기념탑이다. 5미터 높게 탑을 세우면 나라의 위신이 5미터 높아지는가?


종교개혁 발상지 2차 여행을 이끌며 도착한 첫 번째 도시 에딘버러에서 그걸 느꼈다면 파리에 있는 에펠탑을 오르면서는 그런 생각을 했다. 


영국의 철강 산업에 맞서기 위해 “여기 우리도 있거든!” 이라고 소리치고 싶어 했던 프랑스가 뭔가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세운 에펠탑도 사실은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만국박람회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영원한 적수 영국에게 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의 발로였다고 생각하니 에펠탑에서 파리 시내를 바라보며 어쩐지 쓴웃음이 나왔다. 


1930년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세워지기 전 까지는 세계 최고의 탑이었던 에펠탑! 


지금은 석유를 팔아 배가 부른 중동의 산유국들이 하늘을 무시하듯 세워놓은 고층빌딩에 눌려 그야말로 새 발의 피로 주저앉고 말았다.


좀 더 높아지고 좀 더 크게 몸집을 불려보려는 이 세상의 거대주의를 반격이라도 하듯 여행 중 내게 감동으로 다가선 도시는 바로 비텐베르크(Wittenberg)였다. 


사실 이번 순례길에서 비텐베르크는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루터의 도시’란 별명에서 그 이유가 설명된다.


루터가 교황청을 향해 95개 논제를 써 붙인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서 개신교는 잉태되었다. 그래서 비텐베르크는 개신교의 성지다. 


개신교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독일을 넘어 유럽의 역사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로마 교황청의 권위는 실추되기 시작했고 캐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길고 긴 전쟁도 뒤따랐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넌 신교도들로 인해 개신교는 아메리카에서 꽃을 피워냈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산물이었다. 


지금은 인구 약 6만 여명의 중소도시지만 루터 당시엔 2천여 명 정도가 사는 조용한 시골 대학촌이었다. 

이 작은 마을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순례자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루터와 그의 동지 멜랑히톤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는 마르크트 광장, 즉 마켓 스퀘어에 서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작은 마을의 이름 없는 무명의 사제 마틴 루터, 그는 어떻게 천하를 지배하던 교황청에 맞설 생각을 했을까? 

골리앗에 대드는 소년 다윗 꼴이었을 것이다. 

다윗에겐 그나마 물맷돌이 있었다. 루터에겐 그것도 없었다. 그에게 있었던 것은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뿐이었다.얀 후스처럼 화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는 예감이 왜 없었을까? 

건방진 주장으로 교황청을 향해 저항의 깃발을 든 무명의 사제를 심판하겠다고 교황청의 시녀였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루터를 소환하여 보름스로 향하는 길은 누가 봐도 사형의 길이요, 순교의 길이었다. 

심장에 철판을 깔지 않고 어찌 두렵지 아니했으랴? 

비텐베르크를 떠나 보름스로 향하는 그 두려움의 길을 루터가 포기했더라면 종교개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름스의 붉은 기왓장처럼 마귀가 많을지라도 나는 가리라, 나는 보름스로 가리라”고 외쳤던 루터의 용기에서 이미 기독교의 역사는 개혁의 커브 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역사학자 토마스 카알라일은 진리를 주장하기 위해 뒤로 물러서지 않았던 루터의 보름스 입성이야말로 유럽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복음은 이스라엘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시작되었다. 


미가 선지자는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오신다는 말이다.베들레헴 작은 촌락에서 복음이 탄생되었듯이 개신교는 작은 마을 이 곳 비텐베르크에서 탄생되었다. 


에펠탑을 따라 잡겠다는 하늘 높은 탑도 없고 넬슨과 월터 스콧의 경쟁기념비도 세워지지 않은 이 마을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탄생되었다.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큰 물줄기가 되었다. 그 중심에 무명의 사제 마틴 루터가 있었다.


루터 이후 개신교는 거대주의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왔다. 제2의 종교개혁을 요구하는 95개 논제는 보이지 않아도 교황청의 면죄부 수준으로 우리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타락했다는 탄식의 소리는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개신교의 고향 비텐베르크에 가면 우리 시대 개혁의 상형문자가 떠오른다. 

비텐베르크는 작은 시골마을이었다.작아도 된다.


루터는 무명의 사제였다. 유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에겐 ‘내 주는 강한 성’이란 믿음뿐이었다. 그 믿음이 교황을 이겨냈다. 우리도 그 믿음이면 된다.


마르크트 광장에선 성교회 혹은 슐로스교회 첨탑에 독일어로 새겨진 ‘내 주는 강한 성’이란 루터가 만든 찬송가 구절이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그 무엇이 내 인생의 강한 성’이라고 믿어버리는 불량한 믿음부터 회개하는 나로부터 시작되는 종교개혁! 비텐베르크에서 깨달은 개혁의 패러다임은 그것이었다.

<크리스찬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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