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1.jpg
임봉대 목사
<국제성서박물관장>


호남지역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자치, 자립, 자전 원칙에 따라 지역별로 군산, 전주, 광주, 목포, 순천 선교부로 나누어 선교사들이 활동을 하였다. 

예를 들면, 군산선교부는 전킨, 드루, 볼 선교사가 전주선교부는 테이트, 레이놀즈, 해리슨(W. B. Harrison, 한국명: 하위렴) 선교사 등이 사역을 하였다. 

개별 선교부는 전도와 목회를 담당하는 복음 선교사, 학교 운영을 책임졌던 교육 선교사, 의료 분야를 맡의 의사와 간호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 선교부의 선교사들은 교육 및 의료활동을 통해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호남지역 선교부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이러한 선교의 원칙을 잘 유지해 나갔다. 

  전주선교부의 경우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 1895년 레이놀즈와 테이트 남매가 전주로 돌아와 선교활동을 재개하였고 이듬에 전주에 도착한 해리슨과 함께 복음사역과 의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897년 7월 17일에는 김내윤, 김창국과 여자 강씨 임씨 김씨 등 6명이 세례를 받았는데 이들이 전주교회의 최초교인들이다.

  호남은 세계에도 유래가 없을 만큼 많은 순교자를 냈던 한국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지역이다. 
개신교 순교자 1,500여명중 절반 이상이 호남 출신의 순교자였다. 
일제 강점기와 제주 4.3사건, 여순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6.25전쟁 중에는 인민재판을 통해 많은 목사와 교인들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6.25전쟁 발발후 영광군 염산면 일대는 인문군에게 장악되었다. 
UN군의 상륙 소식이 전해지자 주민들은 앞장서서 환영대회를 열었고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에 의한 보복이 자행되었다. 
인민군들은 야월교회의 주요 인사들을 수장시키고, 교인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러 교인 65명을 모두 죽였다. 

염산교회에서도 성도 77명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거나 목에 돌을 매달아 수장시켰다.

호남기독교박물관에는 1910-1953년 사이에 순교한 호남지역 순교자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각종 성경들을 포함한 기독교 유물 1.0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호남기독교박물관의 개관과 관련하여 홍성덕 관장은 “먼저 호남기독교 역사순례의 허브기능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해 호남지역 기독교문화 유산정보화와 순례지 정보 안내기능을 감당한다”면서 “또 기독교 선교를 위한 기능과 역할로서 선교교육 프로그램의 운영 및 채플수업 연계 등을 활용할 계획이며, 호남선교 역사자료 센터로서 아카이브를 구축해 체계적인 자료수집과 연구지원을 펼쳐갈 계획”이라고 설명한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한 7인 선발대의 흉상과 함께 그들의 선교 영상를 접하게 된다. 

이어서 호남지역 순교자 발자취를 사진 설명과 영상을 통해서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외에 선교사 유물, 교회 당회록 등 호남지역 선교 상황과 관련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성경필사하기’ 체험을 통해 방문객들이 전자펜으로 성경구절을 한 구절씩 쓰도록 하고 있다. 

기획전시실에는 다양한 성경들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을 위해 성경을 포함한 다양한 유물을 수집하고 기증받기 위해 전국을 누빈 전주대학교의 김천식 박사(교회사 전공)는 여러 교회가 목사님들이 기꺼이 소장하고 있던 성경과 기독교 유물들을 기증해 주었다며 앞으로 인천에 있는 국제성서박물관과 적극적으로 교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성경들.jpg
▲ 한글로 번역된 성경들


한국교회는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종교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 교육, 그리고 문화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지금까지 불교나 유교의 역사나 문화가 한국의 역사와 문화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이제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문화도 한국의 역사와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해야 할 때가 되었다. 

예를 들어, 한글의 보급과 국어화에 한국어 성경의 역할을 빼놓으면 안된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래 단일 책으로 가장 많은 분량의 한글로 된 책이 성경이요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조차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것은 영호남을 포함한 전국 오지에까지 보급된 한국어성경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계속>

기획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