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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 목사>

 

추수감사절 연휴에 본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내게 주는 ‘희망가’였다.
30여년 넘게 정붙여 살아온 여기 이민사회가 안면몰수하고 배반을 일삼는 살벌한 사채 시장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본 이 영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영화를 보고 난후 16세의 주인공에게 마치 에너지 드링크를 받아 마신 기분이었다.
그래, 태평양 한 복판에서 227일 동안을 표류하면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던 10대 소년의 강심장,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벵갈 호랑이와 손바닥만한 구명선에서 혈투를 벌이며 그 절망의 순간을 이겨낸 용기, 아마 보통사람이면 겁에 질려 미리 죽음을 자처했을지도 모를 환경에서도 끝내 생존의 불씨를 살려낸 모험심, 그래서 나 스스로에게 준 메시지는 “아아, 무기력한 그대여, 다시 일어나라, 벵갈 호랑이를 두려워 말자, 태평양 풍랑을 무서워하지 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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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정부의 지원이 중단되자 동물들을 데리고 캐나다 가족 이민길에 오른다. 캐나다로 가는 거대 화물선이 태평양 한 복판에서 풍랑을 만나 배는 침몰하고 가까스로 구명선에 몸을 실어 주인공 파이는 목숨을 건진다.
그런데 구명선에 가족은 한 사람 없고 다리를 다친 얼룩말, 굶주린 하이에나, 그리고 바나나 뭉치를 타고 배에 뛰어든 오랑우탄이 타고 있는 게 아닌가? 이들을 더욱 놀라게 한 진짜 주인공은 보트 아래 몸을 숨기고 있었던 벵갈 호랑이. . . 이 호랑이의 본래 주인 이름과 바꿔치기가 되는 바람에 ‘리처드 파커’라고 부르게 된 이 호랑이와 함께 구명선에선 숨막히는 혈투가 벌어진다.
배고픔에 허덕이던 동물들은 서로를 공격하며 뜯어먹다가 결국 리처드 파커와 파이만이 배에 남게 된다.
파이는 배에서 발견한 생존 지침서를 바탕으로 점차 리처드 파커와 함께 바다 위에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다.
호랑이를 죽이지 못할 바엔 그를 훈련시켜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한 파이는 호르라기와 긴 막대기를 들고 그를 길들인다. 마침내 물고기를 잡아 던져 주면서 호랑이의 마음을 사고 호랑이는 더 이상 파이를 먹이 상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옛날 북청 청어장수들이 살아있는 청어를 서울에 내다 팔기 위해 청어를 담은 어항에 사나운 가물치 한 마리를 함께 집어 넣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먼 길을 가는 동안 가물치에 먹히지 않기 위해 펄떡펄떡 살아 움직여야 했던 청어 이야기가 바로 파이 라이프였다.
가물치란 도전 때문에 청어가 살아 있듯이 벵갈 호랑이란 위기 때문에 오히려 절망을 깔아뭉개는 생존 에너지가 파이에겐 넘치고 있었다.
이 영화는 얀 마텔의 베스트 셀러를 영화화한 것이다. 2001년 발간된 이 소설은 영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 맨 부커상을 수상했는가하면 전 세계 40개 국 언어로 번역되어 700만 부가 팔려나간 베스트 셀러다. 아마존에선 지금도 스테디 셀러에 올라있다.
어느 소설가는 이 책을 ‘로빈슨 크루소,’ ‘걸리버 여행기,’ ‘백경’을 잇는 소설이라고 극찬했는가 하면 아마존은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모험, 생존, 그리고 궁극적인 신념에 관한 소설이라고 평한바 있다.
이 소설을 갖고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유명한 이안 감독이 메카폰을 잡고 만든 이 영화는 3000여명의 스태프들이 4년여 동안의 제작 기간을 거쳐 세상에 내 놓은 것이다.
금년 제50회 뉴욕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모습을 들어 내자 세계 언론들은 일제히 금년 최고의 영화란 칭찬과 함께 ‘아바타를 이를 비주얼의 신세계,’ ‘내년 아카데미 영화상 작품상’ 등의 찬사를 쏟아 냈다.
이안 감독의 상상력을 통해, 그리고 3D 스크린을 통해 소설을 뛰어넘는 환상적인 어드벤쳐 월드로 관객들을 안내하는 이 영화는 3D 영화하면 떠오르는 ‘아바타’의 환상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재미에다 가슴에 파고드는 내면적 의미 때문에 사람들은 긴 여운을 느끼는 것 같았다.
매일 자신이 표류한 날들을 계산하여 태연하게 보트 한쪽에 표시를 해 가는 용기, 물고기를 잡아 올려 호랑이에게 던져 주는 용기, 구명보트마저 침몰할지 모르는 위급한 풍랑 속에서도 갑판에 넘치는 물을 힘차게 퍼내는 용기, 신을 믿으면서도(그는 힌두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 이슬람교에 입문하여 여러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 신에게 애원하기 보다는 스스로에게 도전하는 용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순간에도 하루의 일들을 또박또박 저널로 기록하는 용기, 딸랑 생명 하나 밖에 없는 구명보트 위의 이 용기 있는 소년 파이는 저물어가는 한해의 석양녘에 여전히 우울하고 여전히 절망하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도전을 걸고 나온다.
당신의 리차드 파커는 누구냐고. 당신이 직면한 태평양 풍랑의 정체는 무엇이냐고.
바다, 호랑이, 소년이 엮어가는 환상의 서사시, 227일간의 인도 소년 태평양 표류기 ‘라이프 오브 파이’는 그래서 금년 대강절을 맞으며 우리에게 다가선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관에서 나온 후에도 나는 오래 생각에 잠겼다. 풀죽은 듯 주저앉은 우리들 실의의 바다에서 털고 일어나 희망의 미사일을 쏘아 올리자고. 그깟 요동치는 바다의 풍랑, 벵갈 호랑이, 그것들과 다시 한번 맞서 보자고.
<크리스찬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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