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 부인 설득에 자선단체 설립
결혼 뒤 기부·가사·육아로 이끌어
“결혼, 일과 삶의 균형을 찾으려는 투쟁”
“남편 그림자 벗어나기 위한 여정 끝에 결심”
세계적인 부호 빌 게이츠(66)와 부인 멀린다 게이츠(57)가 27년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 빈곤·질병·불평등 퇴치를 위해 함께 설립한 빌&멀린다게이츠재단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지만, 앞으로 부부로서의 삶을 뒤로하고 각자 길을 걷기로 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와 직원으로 처음 만나 세 아이를 둔 부부를 거쳐, 세계적인 자선 사업가가 되기까지 그들이 함께한 여정이 이로써 마무리된다.
두 사람은 3일(현지시간) 각자의 트위터를 통해 이혼 소식을 발표했다.
구체적인 사유는 언급하지 않고, 부부로서의 관계에 대한 많은 고민과 노력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만 설명했다.
이들은 "27년 동안 세 명의 아이를 키웠고, 모든 사람의 건강한 삶을 위한 재단도 설립했다"며 "이 사명에 대한 믿음은 계속 공유하고 있지만, 인생의 다음 단계에서 부부로서 더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멀린다가 MS에 들어간 직후인 1987년이다.
미국 듀크대 경영대학원(MBA) 출신인 멀린다는 멀티미디어 제품 개발을 맡고 있었다.
그는 뉴욕 출장 중 마련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당시 최고경영자(CEO)였던 빌과 처음 만났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몇 달 뒤, 빌이 회사 주차장에서 마주친 멀린다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가 "2주 뒤에 데이트하자"고 했지만, 멀린다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며 "나중에 좀 더 가까운 날짜에 데이트를 신청하라"고 했다. 약 1~2시간 뒤 빌이 멀린다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 저녁에 만나자고 하면서 둘의 만남이 성사됐다고 한다.
두 사람은 약 6년간 연애 끝에 94년 하와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빌은 결혼할지를 두고 몇 주 동안 고심했다고 한다.
화이트보드에 결혼에 대한 찬성·반대 목록까지 적을 정도였다.
멀린다는 훗날 "당시 빌은 나에 대해서가 아니라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을 바로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고 회고했다.
96년 첫째를 출산하면서 멀린다는 전업주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약 10년의 커리어를 포기하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어릴 적부터 당연하게 생각해온 일이었다.
그런 그가 우연히 아프리카를 포함해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의 아이들이 설사로 사망한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부부의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멀린다는 2019년 펴낸 책 『누구도 멈출 수 없다(The moment of lift)』에서 지구촌 아이들의 건강 문제가 빌&멀린다게이츠재단을 설립한 계기가 됐다고 소개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당시 빌 게이츠는 공격적인 경영으로 미 법무부로부터 반독점 소송에 휘말린 상태였다"며 "멀린다의 설득으로 빌은 MS 경영에서 물러나 점차 자선 사업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고 전했다.
두 사람은 재단을 통해 세계 보건과 교육 등에 매년 50억 달러(약 5조 6000억원) 상당을 투자 또는 기부해 왔다.
억만장자 부부의 결혼 생활도 결국 일과 삶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한 투쟁이었다.
세 아이 모두 18~25세로 장성했지만, 지난 27년간 육아·가사 분담은 늘 과제였다.
가디언은 "빌이 하루에 16시간씩 일하며 가족을 위한 시간을 내지 않아 멀린다가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전했다. 멀린다는 저서에서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있던 가장 큰 요소는 인내심이었다"며 "컴퓨터 공학을 전공해 주변에 (빌과 비슷한) 괴짜 친구가 많았던 점이 도움됐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함께 규칙을 만들고 지키는 방식으로 노력했다.
저녁 식사 뒤에 항상 설거지를 함께 하거나, 일주일에 두 번 빌이 자녀의 통학을 위해 운전을 하는 식이다.
멀린다는 지난 2019년 비즈니스 인사이더와의 인터뷰에서 "빌이 운전을 한 뒤 점점 많은 아빠가 자녀들의 통학에 동참했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모범 부부'로 통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불화는 이미 몇 차례 드러났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특히 로이터 통신은 "멀린다가 빌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오랜 여정 끝에 이혼을 결심했다"고 보도했다.
과거 멀린다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2013년 남편 명의로 보냈던 재단의 연례 서한을 공동명의로 작성하자고 제안한 뒤 크게 싸웠던 사례를 털어놓았다. 당시 빌은 "왜 바꿔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고, 멀린다는 그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서로를 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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