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일 (10월 14일 월요일)
리바디소에서 아르카 도 피노까지 23Km
알베르게를 다니면서 우리는 벙크 베드의 이층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구든지 아래층에서 자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층을 사용하는 것은 전혀 경쟁이 없다.
어제도 아래층을 양보(?)하고 둘 다 이층을 사용했다.
위층에 올라가서 창문 밖을 보니 시가 절로 나올 것 같은 광경이었다.
이슬비가 내리고 있는데 푸른 풀밭에 소 한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주님을 섬기다가 마음이 너무나 아파 차라리 풀밭의 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그 소원은 안 들어 주셨지만...
아르카 도 피노까지는 약 23km의 길이다.
7시경에 출발했다.
섬머타임이 적용되지 않는 스페인은 8시쯤이 되어야 해가 뜬다.
마침 해발 400m 정도에 올라갔을 때 해가 뜨기 시작했다.
아래는 산 안개가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고 해는 그의 장엄한 모습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정말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은 좋겠다.
그 자리에서 스케치하고 싶은 광경이었다.
그 아름다운 그림을 뒤로 두고 또 걸음을 옮겨야 했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순례자들이 경쾌한 발걸음을 옮겨놓는다.
독일에서 그룹으로 온 일곱 분의 순례자 중에 한 할머니는 그렇게 활기차고 명랑하실 수가 없다. 걸을 때도 양팔을 흔들며 신 나게 걸으신다.
앞에서 가던 순례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친구가 어디쯤 오나 살피는 것이었다.
옆을 지나던 남편과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었다.
보통 순례자는 어디서 오셨는지를 먼저 물어본다.
그 후에 통성명한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왔다는 욘스는 친구 2명과 함께 레온에서부터 걷고 있다고 했다.
남편은 그에게 예수님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서서히 걸음을 늦추며 뒤에 따라가면서 기도를 했다.
한 20분 정도를 욘스와 열심히 대화를 나누던 남편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기다렸다.
욘스도 함께 기다렸다.
그의 부인은 신실한 루터교인이란다.
남편은 그에게 꼭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기를 다시 권고하니 순순하게 예라고 대답했다.
길을 오다가 만난 한국 청년들에게도 예수님을 잘 믿었으면 좋겠다고 권고했다.
우리가 복음을 전했던 자매가 예라고 대답을 했다.
이들을 하나님께 맡긴다. 나에게 허락하셨던 복된 삶을 이들에게도 허락해 달라고....
내일이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영혼의 갈망은 점점 더하다.
제34일 (10월 15일 화요일)
아르카 도 피노에서 산티아고까지 21Km
지난 9월 11일 생장피드포르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아 처음으로 알베르게라는 곳을 찾았다.
앞으로 산티아고에 갈 때까지 이용할 곳이었다.
너무 낯설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남녀 구별 없이 한 방을 쓰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이층 침대 몇 개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전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순례자들은 전혀 불편함이 없는 눈치였다.
나도 순례자로 왔으니 적응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처음 일 주간은 다리가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매일 스트레칭을 하고 밤마다 일어나 주무르면서 씨름을 했었다. 이렇게 시작된 순례가 내일이면 끝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어제도 잠을 설쳤다.
새벽 두 시까지 말씀을 읽으며 지나온 걸음들을 되돌아보았다.
많은 그림이 들어가 있는 시간이었다.
어느 새벽에 주님의 방문이 있었고, 철 십자가 밑에서는 성령님의 통곡 하심이 있었다. 여러 순례자을 만나면서 때로는 아픔을 느꼈고, 때로는 그들의 용기에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했었다. 여러 사연을 갖고 살아가는 인생길에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아 이 먼 길을 걷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와 주시기를 기도했었다.
남편은 아이패드에 찬양과 말씀을 담아 아이패드를 잠바 속에 넣고 찬양과 말씀을 들으면서 걸었다.
같이 걷던 순례자들이 찬양 때문에 발걸음을 멈추고 감사의 표시를 했었다.
남편과 같이 걷고 있지만, 주님과의 대화는 각자의 내면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말들을 하지 않았다. 일상을 상의하지도 않았다. 걸을 때는 순례자로, 숙소에 도착하면 서로 돌보아 주는 남편과 아내로 지냈다. 우리 속에 너무나도 간절한 갈망이 주님을 향해 집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어젯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더욱 세차게 내렸다. 우리가 그렇게도 씻어내기 원했던 모든 죄악의 찌꺼기를 주님께서 이 세찬 비에 완전히 씻겨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며 은혜의 단비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출발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감사의 시간이었다. 순례자들이 서로 돌보면서 격려하면서 빗길을 마다 하지 않고 묵묵히 걷고 있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산티아고 대 성당 앞에 도착할 것이다.
그곳이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종착점이다.
비는 조금도 멈출 기세가 없지만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카미노를 걷다 보니 많은 인생의 교훈이 이곳에 있었다.
어떤 날은 정말 포기하고 싶고 그냥 버스나 탈까 하는 날도 있었다.
짐이라도 부칠까 하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는 내가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나의 모습과 마음을 드려다 보았다.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미래의 결과를 미리 보고 오늘의 결정을 한 것이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현실만 보면 잘못된 결정을 하지만 미래의 결과를 미리 보면 현재의 고됨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다.
특별히 신앙생활은 더욱 그렇다. 구원 후에 성장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목적지가 가까이 왔을 때가 가장 걷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 목적지를 높은 산에서 미리 본 경우는 더욱 힘들었다.
우리가 부르고스로 향해 갈 때 산에서 너무나도 선명하게 도시를 보았다.
바로 앞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려 16km나 더 걸어야 그 도시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 이후로 항상 하는 경험은 도시로 들어가는 마지막 3~4km가 가장 힘든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다.
목표가 가까이 왔을 때 우리는 주저앉을 때가 너무 많다. 그래서 다시 시작한다.
실패의 반복이다. 말씀 연구도, 기도 생활도, 성품 개발도, 맡은 사역도, 남을 돌보는 일도 주님이 원하시는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고 얼마 남지 않은 바로 그 지점에서 그만둔다. 이번 순례는 나에게 지속적으로 걸으면 목적지에 도달함을 가르쳐 주었고 거기에 진정한 쉼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제35일 (10월 16일 수요일)
산티아고에서 네그네이라까지 2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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