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자리 박지훈 기자

주인공은 마트에서 세 살배기 아들을 잃어버린다. 평범했던 삶은 크레바스처럼 갈라진다. 

주인공 부부는 회사를 그만둔다. 보험을 해약하고 아파트를 판다. 아침이면 지하철역에서 전단지를 돌리고 주말이면 고물차를 끌고 전국을 돌아다닌다. 

얼마 안 되는 재산을 헐어 쓰면서 하루하루를 버틴다.

급기야 아내는 조현병까지 앓게 된다.

11년이 흐른 어느 날, 주인공은 아들을 찾게 된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아들은 자신을 유괴해 10년 가까이 키우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성을 그리워한다. 

그에겐 그 유괴범이 엄마였으니까, 세상의 전부였으니까. 

아들은 화장실에 틀어박혀 엉엉 울고 정신이 나간 아내는 만화영화만 본다.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지나고 보니 어찌어찌 견뎌냈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은 바로 지금인 것 같았다. …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결승점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이 같은 이야기가 담긴 김영하의 단편 ‘아이를 찾습니다’는 인생의 선득한 진리를 되새기게 해준다. 

행복이란 때론 질그릇처럼 깨지기 쉽고, 그렇게 깨져버린 어떤 행복 중엔 원상복구가 불가능한 게 있다는 것을. 김영하는 이 작품으로 세월호 참사 이듬해인 2015년 김유정문학상을 받았는데 당시 그가 밝힌 수상 소감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됐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종교의 쓸모를 자문할 때마다 나는 이 소설을 떠올리곤 한다. 

어떤 사건을 겪고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전부인 사람에게 종교는 유일한 삶의 밑돌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종교, 특히 한국교회는 그들에게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 

매년 붕어빵처럼 비슷한 캠페인이나 반복하면서 귀한 헌금만 탕진하고 있진 않은가. 

특히 누구의 말마따나 ‘풍속의 감시자’ 노릇이나 하면서 희한한 혐오나 조장하고 온갖 편견만 풀무질하고 있는 건 아닌가.

소설가 복거일이 쓴 ‘소수를 위한 변명’에는 복거일 특유의 어기찬 개인주의를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한가득 담겨 있다. 

그는 인류니 민족이니 국민이니 하는, “추상화의 과정”을 거친 말들에 담긴 간특한 폭력성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인류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 곳에서 개인들은 ‘멸종의 위기를 맞은 종(種)’이 된다”며 이렇게 말한다.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데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너그러움이다. 그렇게 구체적 사람들을 보게 된 뒤에야, 우리는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들 대신 추상적 ‘인류’를 껴안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다.”

가끔 나는 많은 교회가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처럼 대하는 몇몇 부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상상해보곤 한다. 

그들에게 교회는 어떤 곳일까.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이가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 엄존한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까.

언젠가 이런저런 문제로 사람들 입길에 자주 오르는 한 대형교회 관계자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왜 그 교회에서 일하느냐고. 그는 답했다. 

자신도 과거엔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졌으나 지금은 아니라고, 

정말 많은 사람이 우리 교회 덕분에 살았다고, 교회가 있었기에 목숨을 건졌다고. 

나는 이 말에 얼마쯤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아이를 찾습니다’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소설 첫머리에서 주인공은 정비사 출신 가수 지망생이 오디션 무대에서 손에 쥐고 있던 볼트를 보면서 생각한다. 

“저렇게 손에 아무거라도 쥐고 있다면, 쥘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참 좋겠구나.”

교회의 역할도 비슷할 것이다. 

힘든 이가 있다면 그가 누가 됐든 손에 쥘 수 있는 무언가가 돼주는 것, 그래서 그를 살아가게 만드는 것.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교회의 힘은 지금처럼 계속 졸아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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