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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희 집사
(새크라맨토 한인장로교회)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시며
간구하는 자 믿는 자의 편에서 능력을
발휘 하시는 분임을 내 맘속에만
묻어 둘 수가 없어 입으로 시인합니다.

 

어느 날 그 여자는 우리의 모임에서 또 나 들으라고 의도적으로 한마디 던졌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여자는 딸이 없는 여자야” 여섯 명의 여자들은 모두 딸을 갖고 있음을 알고 내 맘을 꼭꼭 쑤셔놓은 그 말은 듣기 좋은 말은 정말 아닌 것이다.
나는 참 못난 바보 같았다. 나는 왜 그에게 이유 없이 늘 이렇게 당해야만 하는가 속도 많이 상했다.
나는 그에게 내 속이 시원하게 되돌려 줄 말을 못하고 입다물고 돌아서곤 했다. 그냥 꾹꾹 된장 눌러주듯 참았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 말씀을 위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1년 후 오래가지 못한 우리들의 모임은 깨지고 지금은 입 소문을 타고 간간이 소식을 듣고 있을 뿐이다. 임신 중에 난 아이의 성별감정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꼭 딸을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 교회에서 권사님이 얼굴이 퍼지지 않고 예쁘고 뒷태를 보니 딸일 것이라며 듣기 좋게 말씀해 주시는 분이 있었다. 그런 말은 내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듣고 있어도 듣고 싶은 말이었다.
드디어 날이 왔다. 산고의 고통을 끝내고 신기하고 놀랍게도 아주 예쁜 딸 아기가 내 팔에 안겼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의 편이시고 그 동안 내 맘의 한 고통을 말끔히 거두어 가 주셨다. 주님 이것이 나의 간증 입니다. 딸은 지금 21살로 활짝 피어 가고 있는 꽃보다 더 예쁘게 성장해 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을 위해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남은 생을 주님께 영광 드리며 살겠노라 41살 때 결심했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고 앞으로 후반부의 삶을 설계해 볼 필요가 있는 일종의 턴잉 포인트가 있어야 할 시점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보 잘 것 없는 내가 매달리고 청을 부탁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지만 오직 한 분 하나님은 늘 내 편이셨음을 믿었다.
나는 말도 되지 않는 정말 속된말로 “깡 배짱”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나는 나름대로 터득한 하나님의 공식을 안다. 구하고 찾는 자 그리고 두들 이는 사람에게 어떤 형식으로든 응답을 주신다는 것이다.
나는 대단한 그 무엇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함이 아니고 저에게 능력을 주시면 악기 하나를 배워서 하나님께 목소리가 아닌 악기로 찬양하며 살겠다고 했다.
다룰 수 있는 악기 하나 없고 음악에 대한 백 그라운드는 전무한 문외한인 오직 할 수 있는 경력은 솥뚜껑 운전이 다인 말 그대로 평범한 주부다.
나의 소망은 일반 찬송가를 연주 할 수 있기를 바라고 내 욕심 또한 거기까지 이오니 이 일에 있어서 그 누가 비웃고 알아 주지 않아도 하나님 저와 함께하신다면 할 수 있다고 믿고 의지하면서 10년의 목표를 세웠다.
첼로란 악기를 한 7년쯤 연습하니 뭔가 조금씩 되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펑펑 남아도는 삶이 아니고 직장과 초등생의 두 아이와 가사일을 끝내고서 악기연습은 늦은 저녁에라야 가능했다.
이러한 내 삶의 동기부여는 내 안에 주님이 계시기에 소망과 꿈을 품을 수 있었음을 나는 시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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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스로가 택한 고난의 길이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길고 긴 첼로와의 싸움은 나를 위로하는 친구요 같이 장시간 놀 수 있는 귀한 놀이기구로 바뀌어 갔다.
심금을 울리는 첼리스트 요요마와 같은 소리는 낼 수 없지만 호흡 있는 자마다 하나님께 찬양을 할 찌어다 라는 열심과 정성이 있기에 그나마 기 죽지 않고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지겠지 하며 지금도 하루에 1시간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실력은 없어도 한 3년 정도 교회의 오케스트라 멤버로 또 다른 교회에서도 바이올린과 피아노와도 같이 연주해 보았다. 지금은 등록해 있는 새크라멘토 한인장노교회에서 주일 예배 때 피아노와 함께 찬양으로 봉사하고 있다. 나는 또 소망하며 꿈꾸는 것이 있다.
첼로 솔로를 해보고 싶은 것이다. 턱없이 부족하고 미흡하지만 지금도 진행형인 내 삶 속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늘 나를 설레 이게 만드신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구하고 찾는 것 마다 주시는 그런 체험을 첼로를 배운 뒤에도 계속 보여주고 계시다. 재 작년 3월쯤 이다 딸이 먼 곳으로 대학을 가느라 그 애가 쓰던 멋진 그랜드피아노가 제 값을 못하고 빛도 발하지 못하는 것이 늘 맘에 쓰였다.
저것을 누군가 만져주면 좋을 것 같다는 나의 황당한 생각이 또 발동했다. “하나님 제가 한 번 해 보겠으니 도와 주세요” 어쩌면 나는 늘 계란을 갖고 바위를 깰려는 황당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믿는 구석이 있기에 늘 담대하다. 내가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실력은 오직 오른손으로 딩딩 거려 보는 것이 다다.
 어느 날 나는 맘을 가다듬고 처음으로 찬송가를 그것도 두 손으로 피아노를 치겠다며 건반 위에 올려 놓고 “나 주의 도움 받고자”를 쳤을까 아니면 죽을 섰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지 신기하고 놀랍게도 완벽하진 못했어도 매끄럼하게 그 곡을 왼손과 오른손의 합작으로 끝까지 해냈다.
피아노는 늘 집에 있었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그리고 나에겐 힘든 악기였다. 두서없이 혼자서 배우는 것이지만 지금은 왠 만한 일반 찬송가는 거의 할 수 있다. 이것이 다 라고 손 놓고 있을 내가 아니다. 또 뭔가를 찾기를 원했다.
하나님 이제는 손으로 하는 악기 말고 입으로 할 수 있는 악기를 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내 기도의 형식은 정말 어린아이 수준이다. 우선 간단명료하다.
우는 아기처럼 쉽게 한다. 기도를 잘 할 줄 모르는 이유도 있다.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계시는 주님 앞에서 많은 말 보다는 내가 그것을 하겠다는 의지와 맘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입으로 하는 악기를 나열해 보니 꽤 되는데 그 중에서 고른 것이 하모니카다.
그 이유는 내가 아주 어릴 적 한 45년 전의 어떤 기억이 떠올라서이다. 동네의 한 아이가 하모니카를 들고 나와 자랑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부는 것인지 말한 것이 내 머리 속 한 구석에 지워지지 않고 그 오랜 세월 자리하고 있어서 시도해 보고 싶어졌다.
나는 지체하는 성격이 못되어서 당장 악기점에 가서 하모니카를 사왔다. 집에 당도하자마자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크게 심호흡을 한 번했다. 과연 한 번도 불어 본 적이 없는 이 조그마한 악기를 소화해 낼 수 있을까 반신반의 하면서 입에 대고 눈을 감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 모든 노래가운데 악보 없이 즉흥으로 할 수 있는 단 한 곡 “나의 살던 고향”을 불기 시작했다.
처음엔 저 나이에 또 무슨 엉뚱한 짓을 하는가 기대와 눈길도 주지 않고 있든 남편은 노래가 끝나자 조금은 얼이 빠진 상태라 할까 저 여자 뭔가 집어 들기만 하면 그럴싸하게 해낸다는 그런 모습이 역력했다.
연습 한번 없이 감정도 조금 넣어서 멋드러지게 불렀다. 주님 사랑해요. 아무런 재능도 능력도 없는 쉰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이렇게 많은 것을 감당하게 하시니 참 놀라운 주님의 능력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막간을 이용해 작년에 사물놀이를 할 수 있는 장구도 배웠다. 얼마 전에 교회의 한 행사에서 신명 나게 장구를 연주했는데 호응이 좋았다.
배운 것을 같고 주위사람들과 나 눌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한 번쯤은 내가 다룰 수 있는 악기 모두로 주님 안에서 공연도 해 보고 싶다. 지금도 풀타임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언제 내 삶의ing가 멈춰 질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계시기에 열심을 다해 또 뭔가를 구하며 살 것임이 분명하다.
비 할 수 없는 그 은혜를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시고 형제여 주 앞에 나와서 더 지체 말고 받으라 말씀하시는 좋으신 하나님. 주님 이것이 나의 간증입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는 대로 나 몸 되어 사는 그때까지 첼로로 주님을 찬송하리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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