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출신 목회자 충주 지극히작은교회 조바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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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만난 조바울 목사. 탈북민 출신의 조 목사는 “북한에서 범법자로 우상의 아비인 거짓을 배워왔던 저에게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참진리를 가르쳐 새사람으로 변화시켜 줬다”면서 “하나님과 이 나라에 평생 빚진자가 되어 섬기며 살려고 한다”고 말했다.

 

탈북민 출신 목사 조바울(59)의 원래 이름은 조영호다. 

조영호는 도둑의 인생을 살았지만 조바울은 하나님 말씀을 도둑질하는 것은 아닐까 늘 걱정하는 목사다. 

조 목사의 인생이 완전히 바뀐 것은 31세였던 1994년 탈북과 함께였다. 함경북도 청진의 김책제철연합기업소에서 근무하던 조 목사는 퇴근길에 몰래 10t 화물차에 올라탔다. 

적재함에서 물렁물렁한 큼지막한 자루가 있어서 밖으로 던지고 뛰어내렸다. 

열어보니 꿩 18마리가 있었다. 

집마다 돌아다니며 팔았다. 

알고 봤더니 그 꿩은 최고지도자 김정일이 사냥해 함경북도 도당 간부 18명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다.

조 목사는 "죽을 죄를 지었으니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도 "살려면 이 나라를 속히 떠나라"고 했다. 

조 목사는 이미 청소년 시절부터 이런저런 절도죄를 저질러 처벌받은 이력이 있었다. 

그렇게 무작정 청진을 떠나 중국과 접경지역인 무산으로 향해 94년 2월 14일 밤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 동북 지역을 전전하다 그해 6월 30일 톈진에서 인천항으로 향하는 국제여객선에 불법 승선해 대한민국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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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10월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협정 회담 모습. 왼쪽 세번째가 러시아어 통역 담당인 조 목사의 아버지 조경환씨다.

 

● 목사가 된 평양의 도둑 청년

 

6개월간의 국가정보원 조사를 거치면서 교회 장로인 조사관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처음 들었다. 

조 목사는 "대한민국에 와서 가장 먼저 충격받은 게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위해 예비하신 분들 같았다는 것"이라며 "내가 혈기를 참지 못해도, 말실수해도 용납하고 다 참아줬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북한 같으면 싸움이 일어나야 하는데 이분들은 다 나를 어린애처럼 이해해 줬다"면서 "나처럼 악하고 더러운 놈이 없는데 이걸 다 참고 수용해주고 인내해주신 분들은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조 목사는 자동차 부품업체와 액자공장 등에서 일하며 매주 토요일 다른 탈북자 10여명과 함께 예용범(일산제일교회) 목사의 지도로 성경공부를 했다. 

조 목사를 아는 모든 사람은 "너는 신학을 안 하면 사람도 아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 목사는 "세상에 너무 많은 빚을 졌다는 걸 안다. 그 빚 갚으려면 신학을 해야 하겠구나, 주님이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한다면 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조 목사는 2000년 대신대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한다.

서서히 키워가던 그의 신앙이 도약하는 순간이 있었다. 

대신대 입학 전 선교단체 예수전도단의 합숙훈련을 받던 중이었다. 

북에 남겨뒀던 누이동생과 연락이 닿았다. 

중국 지린성 옌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돈을 모아 한걸음에 달려갔다. 막상 도착하니 연락이 되지 않았다. 

자포자기한 상태로 돌아오는 항공권 비용만 남겨두고 모아간 돈을 전부 보육원에 기부했다. 

출국 직전에서야 동생을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돈 한푼 못 쥐어 주고 돌아서는데 눈물도 안 나왔다고 한다. 

조 목사가 탈북한 뒤 아버지는 오지로 쫓겨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소식도 들었다.

한국행 비행기가 뜨자마자 통곡하기 시작했다. 

'진짜 하나님 살아계십니까'라고 속으로 외쳤다. 

조 목사는 "내 가족을 돌볼 수 없다는 사실에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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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목사가 직접 돌에 ‘예수’라는 글자를 새긴 조각상.

 

● 하나님 뜻을 찾다 시작한 수안보 생활

 

2012년 목사 안수를 받으며 '바울'로 개명한 조 목사는 2014년 충주시 수안보면 월악산 자락에 셋집을 얻어 '지극히 작은 교회'를 세웠다. 

인근 탈북민 등과 함께 성경 공부를 하면서 가끔 간증이나 설교를 하러 도시 '나들이'를 한다. 

나머지 시간은 노동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약초를 캔다. 

사실 조 목사는 신앙을 갖게 된 이후 생활 걱정은 안 했다. 

그는 "모든 게 다 하나님 아버지 것이고, 그걸 우리가 쓰고 살기 때문에 번듯한 집이나 차 뭐 그런 거는 필요 없다"면서 "성경 말씀 하나면 충분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지키고 살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조 목사는 믿지 않는 영혼, 특히 탈북자 전도에 모든 것을 바쳤다. 

작은 승합차를 할부로 사서 작정한 탈북자 집 앞에서 밤새 기다려 교회로 데려가곤 했다. 

밥도 사 먹이고 선물도 주고 필요하다는 건 모두 구해줬다. 

조 목사는 "한 영혼이라도 교회에 등록하고 믿음이 자라고 눈물로 회개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 천국이 따로 없다"면서 "이게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현재 여의도순복음교회 통일교구와 연합사역을 하는 조 목사는 최근에도 10여명의 탈북민을 전도해서 양육하고 있다.

조 목사가 항상 마음에 품는 말씀이 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를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에베소서 4장 28절). 

조 목사는 "신앙을 갖기 전 도둑의 인생을 살았다. 도둑놈에게 소망을 주는 말씀이었다. 그 훔치던 손으로 수고해서 궁핍한 자를 돕는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가"라고 말했다.

 

● 나의 외할아버지 김익두 목사

 

조 목사의 아버지 조경환은 6·25 전쟁 당시 김일성의 러시아어 통역 장교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조선체육지도위원회 간부까지 지냈다. 

'잘 나가는' 집안이 될 수 있었지만 '출신 성분'이 좋지 못했다. 

조 목사 집안은 1976년 평양 거주자들을 지방으로 이주시키는 '소개사업'에 따라 평양에서 평안북도 동림으로 추방됐다.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들은 얼마 안 있어 평양으로 돌아갔지만 조 목사 집은 아니었다. 

외할아버지가 황해도 대지주에다 멸공단 책임자로 총살까지 당했기 때문이다. 

평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산당 간부의 조언대로 아버지는 어머니와 합의이혼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기 출세와 명예를 위해 아내까지 버렸다는 욕을 들으며 결국 평양으로 가지 못했다. 

어머니는 동림탄광 식모로 일하다 1년 뒤 사망했다.

조 목사가 외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게 된 것은 탈북 이후였다.

한번은 서울 승동교회를 찾았는데 그 교회 8대 담임목사로 1920년 한국교회 부흥 운동을 이끌었던 김익두(1874~1950) 목사의 사진이 걸려 있는 걸 봤다. 

조 목사 어머니가 간직했던 사진 속 외할아버지였다. 

남한에 축구 잘하는 외삼촌이 있다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한국 축구의 대부'로 불리는 김용식(1910~1985)이었다. 김익두 목사의 셋째 아들이다.

 

● 내 평생의 꿈은

 

"나는 죄로 가득해 살 소망을 잃었었다. 이렇게 사느니 죽자는 생각뿐이었다. 진짜 살아도 지옥 같은 삶이었다. 복음을 들은 후 빛을 봤다. 소망을 본 거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느꼈다. 땅속에서 진주 보석을 받은 거나 다름없다. 지옥에서 나와 천국으로 왔다고 늘 말한다."

지난달 인터뷰에서 조 목사에게 꿈이 무엇인지 묻자 먼저 한 말이다. 

그러면서 진짜 꿈 이야기를 했다. 

그는 "바로 6·25 때 새벽기도를 드리다가 공산군에 총 맞아 죽은 외할아버지 김익두 목사의 사명을 잇는 것"이라고 했다. 

백과사전에는 김익두 목사는 "1950년 10월 14일 신천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난입한 공산군에 의해 피살됐다"고 적혀 있다. 

그는 "평양 금수산 언덕에는 김일성 부자 동상이 서 있다. 우상이다. 통일되면 김부자 우상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교회를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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