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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례 할머니가 지난달 31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 입석마을 자택에서 '101세 할머니의 기도' 시가 담긴 액자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북 완주군 동상면은 전국 8대 오지(奧地)로 선정될 만큼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이 작은 산골마을에 최근 세간의 이목을 끄는 일이 하나 생겼다. 

이곳에서 101세 '구술(口述) 시인'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백성례 할머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맨날 맨날 기도혀요// 나라가 잘되라고/ 기도허고// 대통령이 잘허라고/ 기도허고// 정부도 잘허라고/ 기도허고// 아들딸 며느리도 잘되라고/ 기도혀요.'

백 할머니는 지난 4월 마을 주민들과 함께 시집 '동상이몽: 홍시 먹고 뱉은 말이 시가 되다'를 출간했다. 

270쪽 분량의 시집에는 동상면 4개리, 17개 마을, 주민 133여명의 시 150편이 수록돼 있다. 

시집 맨 앞 장에 백 할머니가 구술한 '100세 할머니의 기도'가 수록돼 있다.

그는 매일 아침 나라와 대통령, 자식을 걱정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을 담아 시로 풀어냈다.

백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지난달 31일 동상면 수만리 입석마을로 향했다. 

오지 마을답게 꼬불꼬불한 산길을 승용차로 한참을 달린 후에야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낡지만 옛 멋이 느껴지는 120년 된 수만교회가 눈길을 끌었다. 

이 교회 권사인 백 할머니는 교회에서 50m 떨어진 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자택에 들어서자 분홍색 모시 저고리를 곱게 차려 입은 백 할머니가 반갑게 맞이했다. 

101세라는 나이가 믿기 어려울 만큼 허리는 꼿꼿했고, 정정했다. 

노환으로 귀가 조금 어두워져 불편을 겪을 뿐 지금도 매일 수만교회 새벽예배에 나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호미를 들고 텃밭에서 직접 채소도 가꾸며 뒷산에서 산책도 한다고 했다.

귀가 어두운 할머니를 대신해 인터뷰를 도와준 아들 유경태(63)씨는 "요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오가는 이들이 많아져서 매니저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를 배운 적도 없고, 글도 모르는 그가 어떻게 시집을 출간할 수 있었을까. 

시인이자 동상면의 전 면장이었던 박병윤씨가 직접 발품을 팔아 어르신을 만나 구술 증언을 채록해 그들의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를 시로 담아냈다.

박씨는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작은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 동네 어르신들이 한 세기를 살아온 백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의 삶을 기록해두면 좋겠다고 먼저 제안했다. 백 할머니를 기록하기 위해 시작된 일이 다른 어르신들이 살아온 이야기까지 차곡차곡 담아 시집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20년생인 백 할머니는 입석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부모님이 나하고 언니하고 둘만 낳았어. 나를 아들로 삼아 키웠지. 열일곱 살에 네 살 위의 남편을 중매로 만나 결혼했는데 남편을 데릴사위로 들였지. 남편은 우리 부모님께 잘하고 나한테도 참 다정한 사람이었어."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해 냈다. 

백 할머니는 "일본인들이 마을 사람도 많이 죽이고 곶감, 나락(벼)도 공출해 갔어. 금방 또 6·25사변이 터져서 빨치산들이 들이닥쳐 닭과 소도 잡아먹고, 집과 옷도 빼앗았어. 난리를 두 번이나 겪었지"라고 말했다. 나라를 잃어 본 슬픔이 얼마나 큰지 알기에 그는 "매일 새벽 나라와 대통령을 위한 기도를 한 번도 빼먹지 않는다"고 했다.

백 할머니는 5남매를 낳았다. 

어려운 살림에 소 두 마리를 팔아 유일하게 대학에 보낸 장남은 졸업 후 개척교회 목사가 됐다. 

4대째 이어지고 있는 신앙의 집안에는 손자를 비롯해 손녀사위 등 4명이 목회자와 선교사로 활동 중이다.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며느리가 심장마비로 숨졌다. 

장례를 치른 뒤 3일 만에 목사 아들도 심장마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자식을 앞세운 슬픔, 이해할 수 없는 이 고난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백 할머니로부터 "오직 순종하는 믿음과 기도였다"는 짧은 답변이 돌아왔다.

백 할머니의 장수 비결은 뭘까. 

유씨는 "어머니는 고기를 즐겨 드시고, 무엇보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찬양을 즐겨 부르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웃으며 사는 게 가장 큰 장수 비결인 것 같다"고 귀띔했다.

할머니에게 기도 제목을 물었다. 

그의 또 다른 시 '100세 할머니의 소원'과 동일한 답변이 돌아왔다.

'암것도 바랄 게 없고 그냥그냥 웃고 살지/아들딸 걱정할까 아플 것도 걱정이여/아, 팔십 먹은 할매들도 치맨가 먼가 잘 걸린댜/나도 안 아프고 영감 따라 후딱 가는 게 소원이여.'

 

<국민일보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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