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전 장관의 "시대를 향한 메세지", 코로나 위기극복 기독교에 길있다

<이어령 전 장관 국민일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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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영인문학관에서 '코로나 패러독스' 어젠다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위기는 기회다. 대재앙은 기독교에 늘 있었던 일"이라면서 "교회가 쇠퇴해가는 생명의 가치를 일깨우고 인간의 오만과 그로 인한 재앙을 극복했던 그 힘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전 장관의 서재는 서울 종로구 평창로 북한산 자락의 영인문학관 내 2층에 있다. 

영인(寧仁)문학관은 이 전 장관과 그의 아내 강인숙 교수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딴 명칭이다. 

한옥 대청마루처럼 넓고 아늑한 2층 서재는 도서관 한 채보다 커 보였다. 

그의 서재에는 '광복 76년, 미래 24년' 대한민국 100년이 꽂혀 있었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고 문학과 정치, 문화와 문명을 가로지르며 방대한 지식과 날카로운 통찰로 시대를 선도하는 우리나라 대표 지성의 모습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 장관의 비밀스러운 서재의 문을 여는 순간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접목하고 사유하며 사회의 변화와 미래를 읽어내는 통찰력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한국인 정체성에 관한 담론,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무궁무진한 히스토리 등 그의 담론에 대한 기대감은 형언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 산업화를 몸으로 체험한 이 전 장관을 통해 인류의 삶과 문화를 해독하고 앞으로 대한민국과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리해 볼 절호의 기회였다.

 

△다음은 이 장관과 주고받은 일문일답이다.

 

▶ 온 지구와 전 인류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재앙을 겪고 있습니다. 종교가 현실적으로 그 구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으신가요.

 

이 불행 속에서도 우리는 오늘날 모든 현대인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여러 가지 종교적 가치와 구제를 찾게 되었다고 봅니다. 

첫째로, 인간의 능력으로 쌓아 올린 문명과 문화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가를 보았습니다. 

쓰나미로 한 도시가 사라지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기독교에서 제일 큰 죄악이 '휴브리스(Hubris)', 인간의 오만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 문명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았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생존의 수단 때문에 생명의 귀중함을 모르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 각국의 차이를 국내총생산(GDP)의 숫자로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이제는 코로나의 발생 수와 사망자 수로 바뀌었습니다. 

전 인류가 이 세상 모든 가치 가운데 생명 이상의 것이 없다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인간은 죽는 존재이면서도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온 것입니다. 

셋째로, 특히 기독교 국가와 기독교인이 가장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기독교 문명의 본바탕인 유럽은 물론 한국에서도 많은 시련을 겪고 있어요. 

꼭 중세 시대 페스트로 인해 기독교의 기반이 흔들리던 때와 같은 그런 위기를 맞이했다고 봅니다.

 

▶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하나님이라는 말을 부모님이라고 바꿔보세요. 

우리가 부모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우리는 지금까지 부모님을 믿고 살아왔지 정말로 나를 낳아주셨는지 나를 사랑하시는지 의심해 온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런데 부자지간에 증명이라는 말이 나오면 이미 그건 끝난 이야기예요. 

어느 날 아들이 "어머니 아버지가 정말 저를 낳으셨는지, 저를 사랑하고 계시는지 증명해보십시오"라고 한다면 'DNA 감정을 해주십시오'라는 말이 되고 지금까지 저를 사랑하신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에 이미 그 부모 자식 관계는 파탄 난 것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부모 자식 관계가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어떻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증명하는 관계가 아니라 믿음의 관계고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요. 

그것이 바로 가족의 사랑이고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신앙의 세계인 거지요.

 

▶ 증명할 수 있다면 그들의 요구대로 증명해 보이면 되지 않을까요.

 

이미 도마가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내 눈으로 보지 아니하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도 증명해 보이라고 했지요.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증명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신이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증명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신을 증명할 수 있겠어요. 

예수님은 옆구리의 창 자국과 손의 못 자국으로 도마의 회의에 대해 증명해 보였습니다. 

부활을 증명해 보였어요. 증명의 몫은 전지전능한 신보다 지능에 한계가 있는 인간이 할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칸트나 데카르트 등 많은 학자, 수학자, 과학자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썼어요. 자신이 유발 하라리가 얘기하는 호모 데우스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을 증명하려고 한 회의론자에게 직접 하신 말씀을 그들에게 들려주면 됩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진정으로 행복한 자다”(요 20:29)라고요.

 

▶ 하나님은 왜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지 않을까요.

 

기독교에서는 종교를 '릴리전(religion)'이라고 합니다. 

끊어진 끈을 다시 잇는다는 뜻이지요. 또 한편으로는 정독하여 자세히 읽는다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원죄로 인해 끊어진 관계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실낙원이라고 하는 현실상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그 끊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돼야지만 하나님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아우슈비츠를 보고 그때 대체 신은 어디 있었냐고 하지만 직접 그 수용소에서 생활한 빅터 프랭클이 쓴 '밤과 안개'를 보면 신은 오히려 아우슈비츠 같은 지옥의 극한상황에 똑똑히 나타난다는 겁니다. 

극한상황 속에서는 착한 사람이 악인이 되고, 악인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되지요. 

먼 예를 들 필요도 없어요. 

요즘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드라마 '오징어 게임' 그대로입니다. 

극한상황에 놓였을 때 모든 사람이 진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신도 그 모습을 똑똑히 드러내 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지 않는 게 아니에요. 

극한상황 속에서 끊어진 관계가 릴리전, 다시 이어지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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