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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히하해흐호 라루리라래르로

몇 번을 가르쳐 보지만 “이 글자가 뭐지?”물으면 잊었단다.

밥을 먹기 전에는 비누로 손을 꼭 닦아야 한다고 주의를 시키지만 물이 어디 있느냐며 비웃듯이 피리~ 웃어버린다.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열을 내어 말한 후, 그분의 사랑이 고맙지 않으냐고 묻지만 “올라-끔~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한다.

물론 대답을 확실하게 하지 않는 것이 굼즈 여인네들의 문화라고 하지만 속이 터지는 것 같다.

굼즈 부족은 대부분의 밭일을 여인네들이 한다.

여인네들이라고 하지만 10살도 안 된 여자아이들도 밭일하고 나무를 진다.

여인네들이 밭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온 마을이 둘러앙ㄵ아 곡식으로 빚은 막걸리와 같은 음료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모임을 한다.

이런 이유로 아주 어린 여자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마을에서 여인네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여인네들이 사라져 버린다.

에티오피아의 굼즈 부족에는 ‘화해의 딸’이라는 풍습이 있다.

살인 등으로 씨족 같에 분쟁이 있을 때, 각 씨족의 딸을 교환하므로 씨족 간에 화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야케’는 10살 때 씨족 간의 ‘화해의 딸’로 시집을 갔었다.

그런데 시집이 있는 낯선 마을에서 남편의 매질과 성폭행에 겁을 먹은 야케가 집으로 도망을 왔다.

그렇게 집으로 피난을 왔지만, 야케는 왜 돌아왔느냐고 화를 내는 아버지로부터 또 심한 매를 맞아야만 했다.

이런 어린 소녀들이 가슴이 아파, 이렇게 곧 시집을 가야 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화해의 딸’ 학교를 시작했다.

이 딸들이 예수를 믿게 된 후 시집을 가게 되면 복음의 씨앗이 되어 날아간 그곳에서 예수의 꽃을 피우고, 그곳 사람들도 예수님의 향기를 맡게 되기를 소망했다.

‘화해의 딸’ 학교를 시작한 지 6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밭에 가기전에 모일 수 있도록 모임을 7시부터 하는데, 8시까지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 

6시쯤 모두 버섯을 따러 갔단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닌데 오늘은 정말 힘이 빠진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다.

아침에 주부의 손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일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침대에 벌렁 누워버린다.

‘그냥 때려치워? 복음의 씨앗은 무슨… 본인들한테도 먹혀들어 가지 않는데… 소귀에 경 읽기라더니…’

마음이 허물어진다.

굼즈르 바라볼 때 도대체 변화라는 게 있을 것 같지 않다.

몇천 년의 세월을, 모든 세상이 다 바뀌었는데, 여기만 그대로다.

돌로 곡식을 빻고 손으로 밭을 갈고 부싯돌로 불을 피우고 가축과 함께 잠을 잔다.

몇천 년의 세월을, 사람이 달나라로 여행도 간다는 시절인데…

문득 갓 난 기현이를 품에 안고, 나에게 온 그 생명체가 너무 감사해,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속삭이던 생각이 난다.

막 웃기 시작하는 아기를 안고 살아가는 이야기며, 아기에게 바라는 것들이며, 꽤 깉은 이야기들을 했다.

아기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많은 터치가 아기의 감성을 키운다기에, 많은 대화가 아기의 두뇌를 발달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기에 수다스럽지 못한 내가 여러 가지 것들을 중얼중얼 이야기하던 기억이 난다.

아니 꼭 그래서라기보다 그냥 그렇게 눈을 맞추고 얘기가 하고 싶었었다.

내 아들이라서, 하기야 배 속에 있는 아기에게 날마다 성경도 읽어 주지 않았던가.

세상에 나오기전에 성경 일독시킨다고.

그래, 이 굼즈 아가씨들은 나에게 온 영적인 갓난아기들이다.

어쩌면 옹알이로도 응답 못 하는 배 속의 아기들이다.

내가 태어날 나의 아기를 생각하며 성경을 읽어 주었고, 아무런 뜻도 모르고 웅얼대는 아이와 많은 대화를 했듯이, 그래 그렇게 사랑을 나누자.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 해야 할 말들을 하자.

언젠가는 수다스러운 엄마 떄문에 제법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아이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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