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기부 참여율 10년 새 14.8%줄어...美·英 등은 고액 기부 캠페인 잇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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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미국의 석유 황제 존 록펠러(1839~1937)는 지구촌 최고의 갑부로 통했다. 

'최초의 억만장자'로 불리기도 했다. 

가장 많은 자산을 보유했을 때 그의 재산은 15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1.5%에 달하는 규모였다. 

2019년 미국 통신사 블룸버그는 록펠러의 재산 최고액을 현재의 미국 GDP에 적용하면 3310억 달러(416조원)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록펠러는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일에만 인생을 허비하지 않았다. 

록펠러는 50대에 온갖 질병에 시달리다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그 사건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록펠러는 진료를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한 부모가 어린 딸아이 병원비 문제로 소동을 일으키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비서를 시켜 아이 병원비를 몰래 내줬고, 훗날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록펠러는 자서전에서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알려졌다시피 록펠러는 자선 사업가로 인생의 후반기를 보냈다. 

돈을 버는 일에만 급급하던 기업가가 늦은 나이에 의미 있는 곳에 돈을 쓰는 일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록펠러가 50대 이후 삶의 좌표로 삼은 성경 구절은 신약성경 요한일서 3장 17절 말씀이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기부 후진국 대한민국

 

최근 서울 강남구에 있는 법무법인 율촌 사무실에서 만난 우창록 율촌 명예회장은 록펠러가 현대사에 남긴 자선의 무늬에 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는 국민일보와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기부'(세아기) 캠페인을 함께 전개하는 월드휴먼브리지의 유산 기부 센터인 브리지소사이어티에서 김병삼 만나교회 목사와 함께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우 명예회장은 "록펠러는 40명 넘는 비서진을 꾸려 돈을 어떻게 하면 의미 있게 쓸까 연구하며 인생의 절반을 보냈다"면서 "한국인도 이젠 돈 쓰는 방법에 대해 고민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장자 상속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 탓에 생전 재산 기부 문화가 한국 사회에 정착되긴 힘들 거라는 말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교 문화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은 가문입니다. 기부는 가문의 품격을 세우고 가문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 기부 문화는 아직 선진국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상속이 아닌 기부를 통해 자녀에게 '정신적 유산'을 남기려는 분위기를 감지하기 힘들다. 

생전에 재산 일부를 세상을 위해 내놓는 일은 고사하고 소액 기부도 실천하지 않는 이가 대부분인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최근 10년간 통계청이 진행한 '사회조사'만 일별해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조사는 기부 경험이나 의향 등을 묻는 가장 큰 규모의 국내 조사로 지난해의 경우 3만6000여명을 상대로 이뤄졌다.

조사에서 기부 경험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2011년 36.4%에서 지난해엔 21.6%로 나타나 10년 사이에 14.8% 포인트나 떨어졌다. 

향후 기부를 실천할 뜻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도 같은 기간 45.8%에서 37.2%로 8.6% 포인트 하락했다. 

유산 기부 의향도 마찬가지다. 

유산 기부 의사가 있다고 답한 비율은 2011년엔 37.3%였으나 이 비율은 점점 줄어 2019년엔 26.7%까지 떨어졌다.

실제로 한국의 기부 문화는 처참한 수준이다. 

2019년 10월 영국의 자선지원재단(CAF)이 10년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매긴 126개국 기부 문화 순위에서 한국은 57위에 머물렀다. 

CAF는 지난해 6월 '2020년 세계기부지수'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여기에서 한국은 기부참여지수는 22점을 기록, 조사 대상국 114개국 가운데 꼴찌에 가까운 110위에 랭크됐다.

하지만 국내의 이런 분위기와 달리 선진국에선 기부 문화가 갈수록 무르익고 있다. 

특히 유산 기부 성격을 띠는 고액 기부 캠페인이 잇따르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 등이 주도해 2010년 시작된 캠페인 '더 기빙 프레지(The Giving Pledge)'가 대표적이다. 

생전 또는 사후에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를 위해 내놓자는 더 기빙 프레지엔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저크버그,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 CNN 창업자인 테드 터너 등이 참여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김범수 카카오 의장,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이 더 기빙 프레지 회원이다. 

유산 기부는 미국 기부 문화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해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기빙유에스에이(Giving USA)의 2020년 자료에 따르면 총 기부금 450억 달러 가운데 유산 기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10%나 된다.

영국에선 자녀에게 상속할 재산의 10%를 비영리단체에 기부하는 '레거시 10(Legacy 10)' 캠페인이 진행 중인데 여기에는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 등이 동참하고 있다. 

영국에선 유산의 10% 이상을 기부하면 상속세율을 크게 낮추는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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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게 평화를, 노년에 활력을

 

기부의 긍정적인 효과는 세상의 가장자리에 있는 이들을 섬기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특히 유산 기부와 비슷한 맥락인 생전 재산 기부는 가족 공동체를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한국 사회에서는 상속을 둘러싼 다툼 탓에 혈연이 결딴나는 일이 늘어나는 추세다. 

예컨대 대법원 사법연감을 보면 상속 관련 소송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상속재산분할 심판청구 건수만 하더라도 2016년 1223건에서 2020년엔 2095건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부모가 작고한 뒤 가족이 불구대천의 원수가 돼 유류분(법정상속분의 절반) 소송을 제기하는 일도 허다하다. 

한 법조인은 "30억원 이상의 유산을 남기면 남은 가족끼리 싸움이 벌어지는 게 일반적"이라고 귀띔했다.

이런 상황에서 생전에 가족들과 유산 문제를 정리하고 재산 일부를 세상을 위해 내놓기로 결단하는 일은 혈연을 끈끈하게 만들면서 아름다운 가풍을 세우는 방법일 수 있다. 

비영리단체 컨설팅 전문기관인 '도움과나눔' 최영우 대표는 "국내의 많은 단체가 유산 기부 캠페인을 벌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며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터부시하는 한국의 문화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생전에 자녀들과 유산 일부를 사회를 위해 내놓는 것을 놓고 토론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며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면 한국의 자선 문화가 크게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재산 일부를 상속이 아닌 기부로 돌리는 일이 노년의 삶에 역동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을 것이라는 목소리도 많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2019년 '트렌드 코리아 2020' 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5060세대'를 '오팔세대'로 명명해 눈길을 끌었다. 

이 신조어는 '58년 개띠'의 '58'을 의미하면서 활기찬 인생을 살아가는 '신노년층(Old People with Active Lives)'을 뜻하는 단어였다.

김 교수가 소개한 신조어처럼 지금의 노년층은 과거와는 다른 특징을 띠고 있다. 

다른 세대보다 훨씬 더 많은 자산을 보유했으며 그 수도 많다. 

행정안전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국내 인구 5158만3722명 가운데 60세 이상은 1320만7836명으로 전체의 25.6%에 달한다.

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으며 재산 상속이 힘든 1인 가구나 무자녀 가구도 늘어나는 추세다. 

통계청이 지난 3월 발표한 '2021년 한국의 사회지표'를 보면 2020년 국내 평균 가구원 수는 2.34명에 불과했다. 

'한 지붕 세 식구'가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고작 0.81명이었다.

만약 신노년층으로 불리는 세대, 혹은 1인 가구나 딩크족(무자녀 맞벌이 부부)이 재산 일부를 기부하는 일에 적극 나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쩌면 록펠러가 그렇듯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록펠러는 훗날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인생의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선 사업의 조력자였던 한 목회자에겐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난 돈이 노는 것을 그냥 놔둘 수가 없어요. 돈은 회전시키라고 있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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