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하는사회3.jpg

 

헤어진 애인이 밉다며 자동차로 들이받고, 재산 문제로 불화를 겪다 엽총을 발사하는가 하면 연인과 다투고 홧김에 불을 질렀다. 

자신의 차에 경적을 울렸다고 그 차 앞에 끼어들어 10여 차례 급정차로 위협했다. 
주차를 잘못했다고 따지는 행인에게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중상을 입혔다. 

최근 연이어 발생한 분노 범죄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불평등과 양극화로 치닫는 사회 현실에 대한 분노 역시 겹겹이 쌓이고 있다. 

‘땅콩 회항’으로 대변되는 ‘갑질’ 논란부터 연말정산 세금 폭탄 현실화, 전셋값 폭등, 청년실업 증가, 영세 사업장이 몰락해 임금을 받지 못한 경우가 사상 최고에 이르는 등 약자들은 발 디딜 곳 없는 절벽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러한 분노의 치유자로 서야 할 교회마저 분노의 회오리바람이 불고 있다. 

일부 목회자의 전횡과 상식 밖의 설교, 신자 사이의 갈등으로 이 사회 도덕성의 최후 보루마저 손상되고 있다. 
분노하는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통제불능 상태에 놓인 분노 

전문가들은 최근 발생한 분노 범죄가 과거보다 황당하고 잔인하며 피해 규모가 크다는 것에 주목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 언론 기고문에서 “분노가 유발하는 사건들의 빈번한 발생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불안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사회통합이 약화돼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며 “우리 사회에서 분노 조절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심리학에서 분노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 혹은 양쪽 모두에게 부당한 일이 가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일어나는 강한 부정적 감정을 말한다. 

분노는 인간이 가지는 기본적 정서의 하나로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다.  
문제는 한국사회의 분노는 부정적 감정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자제력을 잃은 분노가 폭발하며 ‘욱하는’ 범죄나 폭력 사건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분노의 대상이 어린이나 여성,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인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분노 조절은 이제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의제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역할과 그리스도의 분노 처리 방식은 통제할 길 없는 이 사회에 하나의 선례(善例)를 제공할 수 있다. 

욱하는사회.jpg

분노하라, 그러나 죄는 짓지 마라 

분노는 성경에서 비교적 세밀히 다뤄진다. 

한 보고에 따르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만 600여건 언급된다고 한다. 

분노를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히브리어 명사는 ‘아프’란 단어다. ‘코’ 또는 ‘콧구멍’을 의미하며, 콧숨을 내뿜거나 코를 벌름거린다는 표현으로 노(怒)를 나타내는 데 사용한다. 

잠언에 나오는 ‘노하기를 더디 하다’(14:29)는 구절은 문자적으로 ‘코를 길게 하다’라는 뜻이다. 
호흡과 관련해 미국의 엘머 게이즈 박사가 했다는 실험 이야기는 자주 회자된다. 

게이즈 박사는 마구 화를 내는 사람의 날숨을 채취해 냉각시켜 갈색 침전물을 추출했다. 
이를 증류수에 타서 쥐에게 주사했더니 불과 몇 분 만에 쥐의 심장이 멎었다. 

성경은 분노에 대해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분노는 허용하되 죄가 스며드는 것은 반대한다. 

‘화가 나면 조심하라. 죄 짓기 직전이다’는 얘기다. 
성경(새번역)은 이를 분명히 한다. 

“노여움을 버려라. 격분을 가라앉혀라. 불평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오히려 악으로 기울어질 뿐이다”(시 37:8),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 16:32),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죄악에 대해 분노하라 

사막 교부들의 공통된 능력은 분노를 다스릴 줄 아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분노가 허용되는 조건은 단 하나, 죄에 대한 것이었다. 

백석대 김진하 교수는 “사막 교부들은 분노가 가져올 악한 결과를 생각하고 어떤 경우에도 화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며 “화나게 만드는 사람이나 상황으로부터 즉각 벗어났으며 분노를 이길 힘을 위해 성령께 의지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를 비교하는 것은 분노 조절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팀 라헤이와 밥 필립스는 공저 ‘아름다운 분노’에서 이를 대조했다. 

하나님의 분노는 뚜렷한 목적이 있으며 비이기적이다. 

그의 분노엔 증오나 악의, 원한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분노는 불의를 향해 있다. 

반면 인간의 분노는 통제되지 않고 참을성이 없다. 

증오와 악의, 원한에 사로잡혀 있으며 다분히 이기적이다. 

인간의 분노는 대상을 파괴하며 관계를 깨뜨리고 상처를 준다(표 참조).  

백봉교회 이재홍(46) 목사는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니다. 분노 처리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라며 “예수님도 더럽혀진 성전의 모습에 분노하고 정화하셨다”고 말했다. 

욱하는사회2.jpg
▲ 성전에서 환전상을 내쫓는 그리스도(1304∼1306·지오토 디 본도네 작). 
전을 더럽히는 상인들을 본 예수님이 오른쪽에 있는 두 남자를 향해 분노
하고 있다. 온화하고 자비로운 예수님의 모습에 익숙한 이들에겐 충격적인 
장면이다. ‘거룩한 분노’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화를 내라 그러나 해가 지기 전엔 꼭 풀어라

누구나 분노할 수 있다. 

분노도 감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못된 분노의 표현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준다.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건강하게 표현하고 분노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만드는 것이다.

먼저 목표를 분명히 한다. “‘누구의’ ‘무엇이’ 문제지?” 분노에 이름표를 붙이고 정조준하면 표적치료를 할 수 있다. 

분(忿)은 마음(心)을 나누어(分) 놓는다는 의미다. 흩어버리면 분노는 힘을 못 쓴다. 
일종의 뇌관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운동을 하거나 일기를 쓰고, 친한 친구를 찾아 화난 이유를 말하는 것도 좋다.
화를 내라. 그러나 해가 지기 전엔 풀어야 한다. 

화의 유통기간은 얼마일까. 성경은 하루 24시간이다. 다음 차례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재충전하는 일이다. 

휴식, 걷기와 산책, 가벼운 스트레칭(복식호흡, 이완운동), 독서와 음악감상, 기도와 찬송 부르기, 시 낭송 등이 큰 도움을 준다.  

더 많이 사색하고 더 많이 웃는다. 
웃음을 택하면 현재가 즐거워지고, 분노를 택하면 현재가 비참해진다. 
무엇보다 화를 이겨낸 자신을 무한히 격려하고 보상해준다. 

그러면 항상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자신의 방식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버린다. 
가끔씩 아내가 외출했다가 귀가 시간이 늦으면 대개 남편들은 “당신, 왜 늦게 들어와?”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백발백중 싸움으로 이어진다. 

“너(You)는 반드시 일찍 들어와야 해!”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바로 반발심리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유연한 사고나 소망적인 사고는 약이다.

 아이(I) 메시지를 사용한다. 아이 메시지로 말하면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

 “나는 당신이 늦게 들어와 걱정 얼마나 많이 했는데, 밥도 못 먹었어.”

아이 메시지 표현 방식이 중요하다. 

아이들한테도 마찬가지다. “너 왜 공부 안 하고 게임만 하는거야?”라고 하기보다 “나는 네가 게임을 조금 하고 공부를 더 했으면 좋겠다”라고 표현하는 게 좋다. 

아이 메시지를 사용하는 가정은 평화롭다. 반대로 유 메시지를 쓰는 가정은 분노에 시달리게 된다. 


한국교계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