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서 3가지를 잃고, 南에서 3가지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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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 오후 서울 중구 신당동 탈북자 박미숙(가명·가운데)씨 집에 박씨를 도와준 중구청 사회복지사 이수경(왼쪽)씨, 이정훈(오른쪽)씨가 자리를 같이했다. 박씨는 딸 김수경(가명)씨 사진을 만지며 그동안 도움을 준 두 사람에게 감사를 표했다.


7년 전 북한을 탈출한 박미숙(가명·47)씨의 서울 중구 신당동 한 임대아파트에 27일 오후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중구에서 난로 도매업을 하는 이정훈(34)씨였다. 이씨는 박씨의 딸 김수경(가명·23)씨에게 지난달부터 매달 학비 20만원을 대주고 있다.
딸이 4학년이 되는 내년까지 학비를 지원할 참이다. 북한에서 받은 고문으로 녹내장에 우울증까지 앓고 있는 엄마도 이날은 웃음꽃을 피웠다.

북한에서 잃어버린 세 가지
박씨 가족은 재일교포였다. 1965년 박씨가 한 살 무렵, 그와 아버지는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송선을 타고 '지상낙원'이라는 북한 청진항에 닿았다.
그곳의 주민들은 하나같이 비쩍 마른 모습이었다. 서양화가였던 아버지는 부르주아라는 비판을 받았고 그림은 모조리 불에 탔다.
자아비판 글 300여장을 보위부에 제출했던 아버지는 1981년 함흥의 5층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했다.
그렇게 아버지를 잃었다. 이후 박씨는 일본에서 들여온 중고차를 중국에 파는 '외화벌이 일꾼'이 됐다.
1995년 박씨는 자동차 대금을 떼먹은 중국인을 찾기 위해 딸 수경(당시 7세)을 데리고 당국 허가도 안 받고 중국 지린성에 갔다.
하지만 박씨 혼자 북한 보위부 요원에게 잡혀 돌아왔다. 조선족 가이드 집에 맡겼던 딸은 데려오지 못했다. 그렇게 딸도 잃었다.
박씨는 2000년 딸을 찾기 위해 국경을 넘다 다시 잡혔다. 그리고 북한 보위부 신의주 지부에 1년을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때로는 밧줄에 묶여 눕지도 자지도 못했다. 1년 후 풀려난 박씨는 눈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평양 병원에선 진통제 처방만 내렸다. 그렇게 시력도 흐려져갔다.

남한에서 이룬 세 가지 소원
박씨는 2004년 남한행을 결심했다. 한 한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2004년 1월 북한을 탈출했고, 그해 7월 베트남 하노이를 거쳐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때부터 박씨는 세 가지 소원들을 하나씩 이루기 시작했다. 먼저 중국에서 잃어버린 딸을 찾기로 했다.
탈 북자 지원단체인 '북한구원운동'과 서울 중구 신당동의 이웃들이 2000만원을 모아줬다. 박씨는 이 돈으로 중국을 세 차례 오가며 딸을 수소문했고, 2006년 11월 하얼빈 근처 조선족 가이드 친척집에 머물러 있던 딸을 만나 한국으로 데려왔다.
지난해 11월엔 서울백병원에서 녹내장 수술을 받아 시력도 되찾게 됐다. 서울 중구청이 마련해 준 기부금으로 50만원의 수술비를 댔다. 박씨는 "눈이 멀면 10년 만에 찾은 딸을 돌볼 수가 없어 간절히 낫기를 바랐다"고 했다.
그리고 박씨의 딸이 2009년 경북 포항 한동대에 입학하면서 세 번째 소원도 현실이 됐다.
탈북자 지원 규정에 따라 등록금은 면제됐고, 중구청 소속 사회복지사 이수경씨가 모녀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기부자 이정훈씨를 연결하면서 생활비도 일부 해결됐다.
중구청 기부금은 '드림 하티(Dream Hearty)'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기부금엔 지난해 12월 중구청 건물을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2년 동안 모은 재활용 수익 800만원도 들어 있다.
중구 주민들이 저소득층 지원을 위해 자발적으로 모은 기금이다. 박씨는 "북한에선 수령이 모든 걸 준다고 하면서 사실은 소중한 것들을 다 빼앗았다"며 "한국의 기부는 소원을 이루게 해주는 마법상자 같다"고 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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