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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일 (9월 21일 토요일) 
벤토사에서 산토 도밍고까지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6시 30분 벤토사를 출발했다.
 25Km 걸어서 산토도밍고 전 시루에냐까지로 일정을 잡았다. 2시간 30분 만에 10Km를 걸어 나헤라에도착했다. 
수퍼마켓에서 빵과 사과, 바나나, 요구르트를 사 아침을 먹었다. 그늘도 쉴 곳도 없는 길을 계속 걸었다.
시루에냐에 오후 2시 30분에 도착했다. 
알베르게에 갔더니 WiFi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시설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고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집사람도 난감해 했다. 
이미 충분한 휴식 없이 많이 걸었기 때문이다.
내일은 주일이어서 교회에 안부를 전하려고 오는 길에 동영상을 만들었다. 
보내는 일이 난감했다. 
결국 6Km 를 더 걸어서 산토 도밍고까지 힘을 내서 가기로 했다. 
나도 아내도 무리라고 생각되었지만 도전해 보기로 했다. 
계속 찬양과 사무엘하 말씀을 들으며 힘을 내서 걸었다.
발 바닥에 열기가 느껴지고 느낌이 좋지 않다. 4시 30분 산토 도밍고에 도착했다. 
첫번째 알베르게는 이미 다 찼다. 
50여 미터 더 가 두번째 알베르게에 도착했더니 여 사무원이 매우 친절하게 맞아 준다. 룸이 남아 있었다. 
등록하고 올라가보니 아주 크고 시설이 깨끗하고 잘 되어 있다. 
힘들었지만 더 걸은 보람이 있었다.  
우리를 후대해 주시는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렸다.




[위성교 목사 자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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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과 신발

잘 걸어 주는 발이 소중하고 
고맙다

내 몸 부분 중 가장 낮은 발은 
무거운 짐 지고 걷는 내 온 몸
을 지탱해 준다
힘들어도 걷고 또 걷는 일을 
잘 따라 해 준다

발꿈치는 두텁고 탄력이 있
어서
걷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해 준다
걸을 때 발꿈치 부터 지면에 
닿게하고
약한 앞 발바닥, 발가락 순으
로 걸으면
먼 길을 무리하지 않고 걸을 
수 있다

신발은 소중한 발을 보호
해 주는 
걷는데  가장 고마운 동반
자이다
앞이 넓은 신발이 발을 편하
게 해 준다
좋은 신발을 고르는 것은
평생 동반자인 아내를 고르
는 것 처럼
신중하고 중요한 일이다

하루 종일 힘든 걷기를 마치면
먼지 뒤집어 쓴 수고한 고마
운 신발을 풀고
잘 걸어 준 소중한 발을 맛사
지해 주고
뜨거운 물로 골고루 근육을 
풀어준다

예수님도 복음의 신발 신고
잘 걸을으라고 제자들 발을 
씻어 주셨고
착한 남편은 어진 아내의 발을
씻어주고 맛사지 해준다






제11일 (9월 22일 주일) 
산토 도밍고 에서 벨로라도까지 약 2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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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굳게 닫힌 대성당 문 앞 벤치에서 아침 8시주일 예배를 드렸다. 
이번 기회에 카톨릭 국가에서 주일 미사가 어떻게 드려지는지 8시 30분 미사에 참석해 보려고 계획했다.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시간 바뀐 것을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명목상 카톨릭으로 주일을 중요시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12시 경 조그마한 마을을 통과하면서 걸맞지 않게 크게 지어진 성당이 문을 열고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초록색 예복을 입은 늙은 신부님께서 열댓분 정도 모인 앞에서 미사를 인도하고 있었다. 
모든 중세 예배당에 그러하듯이  천정은 높았고 청동으로 주조된 부조들이 전면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산티아고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은 어디 계신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어떤 분이실까? 
종교 다원주의와 자기각성, 내면세계의 성찰이라는 이름으로 현대인들은, 심지어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조차 그리스도를 대체하고 내면의 영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 한다. 
그리스도 없는 영성이 진짜 영성일까? 
또 하나 자기 속임은 아닐까?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자신의 각성을 쓴 '순례자'를 쓴  유명한 작가 파울로 코넬료가 생각났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연금술사'도 산티아고 길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이라고 한다. 
코엘뇨는 카톨릭 신자인데 자기 각성과 성찰이라는 그리스도 없는 다원주의에 가깝다. 
코엘뇨의 영향 때문에 산티아고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니고데모라는 지성인이며 산헤드린 의원이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자기 각성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요한 복음 3장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바리새파 사람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인의 의회 의원이었다. 
그가 어느 날 밤,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우리는 당신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선생님이 베푸시는 기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내가 분명히 너에게 말하지만 누구든지 2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대답하셨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요한복음 3:5 KLB)
그리스도 없는 자기 각성과 영성은 아무리 지혜로워도 거짓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인이시며,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가 되시기에.
현대판 헬라주의 영성의 함정에서 벗어나라.
"유대인은 기적을 보기 원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것이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돌이며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 23 K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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