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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 선교사의 젊은 시절 모습(왼쪽)

로즈 선교사가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 뉴기니에서 만난 원주민 카파우크족 추장(오른쪽)과 어린 아내 모습. 이들은 로즈 선교사를 만나면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경번역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활동하는 곳. 전 세계 언어종족의 20%가 몰려있는 곳. 범 기독교 인구가 96%에 달하는 나라. 파푸아뉴기니다.
1940년대 후반부터 30년간 뉴기니(독립 이전 이름)의 원시림 속에서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가 있다.
달린 데이블로 로즈(사진) 선교사. 그녀의 첫 개척선교는 1940년 동인도제도에서 남편과 함께 시작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지도 못하고 선교 활동을 중지해야 했다.
당시 태평양 지배를 꿈꾸던 일본의 야욕과 만행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현지에 남아 포로가 됐다. 최근 출간된 ‘보이지 않는 증거’(좋은씨앗)는 그녀의 ‘고난행전’이자 연단을 기록한 책이다.
42년 3월, 일본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강점했고 로즈 선교사의 남편 역시 일본군 트럭에 실려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1년의 감금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외국인 선교사이자 여성에겐 견디기 힘든 날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선교의 연속으로 생각했다. 감금되면서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육신의 안위를 모두 누렸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다른 이들에게 주신다 해도 그것은 그분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욥의 고백(욥 1:21) 같다. 그녀는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진정한 선교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했다.
아무리 성취될 가능성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 변화하는 세상에 살면서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고 불변하는 하나님만 신뢰하는 사람, 절대로 흐려지지 않는 비전을 가진 사람만이 참된 선교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고난은 진정한 선교사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 하나님의 선교는 이러한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뒤이은 3년간의 수용소 생활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다.
당시 남아있던 외국인 여성들과 막사생활을 했던 로즈 선교사는 고통의 기억을 다시 되살렸다. 열거하면 이렇다.
어느 날 아침 먹던 죽에서 닭죽 맛이 났다. 알고 보니 새와 쥐가 빠져죽은 거였다.
죽에 섞인 쥐꼬리와 털, 새의 깃털을 보고 며칠 동안 구역질을 했다.
수용소 인원 3분의 1이 이질에 걸렸고 밤이면 말기 환자들을 향해 쥐가 공격했다.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등 기생충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어느 여선교사는 회충이 기도를 막아 질식사할 뻔했다. 로즈 선교사는 스파이 혐의로 악명 높은 헌병대로 끌려가 갖은 고생을 하기도 했다.
치명적 뇌성말라리아에 걸리기도 했고 비타민B 부족으로 각기병을 앓았다.
그녀는 묻는다. “모든 일이 잘될 때 성경 말씀을 읽고 믿는다고 고백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을 당하면서도 말씀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로즈 선교사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구절이었다.
하지만 불같던 고통을 지나고 이렇게 고백했다. “주님, 저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믿습니다. 저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해도 좋습니다.
주님이 저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감정이나 무아지경의 순간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아도 믿는 것이었다.
로즈 선교사는 그 믿음으로 전쟁 후 다시 뉴기니로 향했다.
49년부터 30년 동안 두 번째 남편과 함께 뉴기니 발리엠계곡과 와기계곡에서 다니종족을 상대로 개척선교를 담당했다.
두 아들은 원주민 속에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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