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70년대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에서 기독교계와 첫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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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태 고문의 마지막 가는 길을 기독교계가 함께 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장례식이 3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엄수됐다.
기독교계는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하며 그의 삶을 애도했다.
명동성당을 향해 가던 김근태 상임고문의 운구 행렬이 이른 아침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앞에 멈춰 섰다.
기독교회관은 7,80년대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의 성지’와도 같은 곳으로, 고인이 평생을 통해 간절히 소원했던 민주주의와 인권, 정의, 평화, 통일을 위해 투쟁했던 장소다.
김근태 상임고문은 1977년 조화순 목사를 만나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 5년 여 동안 노동 상담역으로 일하며 기독교계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종로 5가에서 기독교계와 함께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며 기독 청년 운동에 동참했다.
또 1980년대 군사독재 정부가 자신에게 가한 고문 행위를 폭로하자 기독교계는 고문폭력대책위원회를 조직해 정부에 맞서기도 했다.
김상근 목사(장례위원장. 당시 고문폭력대책위원장)는 김근태 고문을 “그 시대 정의와 인권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주신 종이라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고인을 떠나 보내며 기독교계는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바로 그 곳에 함께 했던 고인을 추모했다.
또 고인이 생전에 못다 이룬 높은 뜻을 이어 받아 민주주의와 인권,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김영주 총무(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데 부족함이 없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해달라”고 했다.
박종렬 공동대표(생명평화 기독교연대)는 추도사를 통해 “고문 없고 차별 없고 오직 사랑만이 있는 하나님의 품 안에 고이 잠들라”고 말했다.
민주주의 대부, 영원한 민주주의자라고 불렸던 김근태 고문은 이렇게 천 여 명의 애도 속에 장지인 마석 모란공원으로 향했다.
이인영 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은 “당신이라는 아름다은 별은 졌지만 수 백 만 수 천 만의 가슴에는 다시 김근태의 깃발이 휘날린다”며 “당신의 이름을 민주주의 역사의 심장에 새긴다”고 말했다.
아름답고 맑은 성직자와도 같았던 정치인, 고 김근태 상임고문.
고인은 갔지만 그의 삶과 뜻은 2012년 새해 초 그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았다.
<크리스천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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