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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선주 목사(왼쪽)과 양전백 목사 (오른쪽).



위대한 부흥사였던 길선주 목사와 양전백 목사를 소개한다.


길선주 목사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이끈 위대한 부흥사로 평가 받고 있다.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한국인 최초의 목사 7인 가운데 한명으로 1919년 당시 한국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고신대  이상규 명예교수는 "평양의 기홀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 때 이승훈과 만나게 됩니다. 이승훈으로부터 그 당시 길선주 목사님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그런 목회자이기 때문에 당신도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 사람으로 가담해 주십시오 요청을 받습니다." 라고 말했다.


민족대표 33명이 서울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던날도 오래 전에 약속한 부흥사경회를 인도해야 했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상규 교수는 "황해도 장연군에 있는 부흥집회를 약속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여를 못하지만 내가 도장을 대신, 참여를 직접 못하지만 내가 도장을 찍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길선주 목사가 선언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경성법원의 재판에서도 무죄가 선고돼 독립운동가로서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미결수로 7개월 동안 복역한 사실이 확인돼 2009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길선주 목사는 집에 태극기를 간직하고 있었고 평양장대현교회도 한국식으로 건축했으며 우리전통가락으로 찬송가를 부를수 있다고 한 민족주의자 였다.


이 교수는 "길선주 목사님은 한국교회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인 동시에 민족운동, 또 독립운동에도 큰 관심을 가졌던 분인데, 그분이 이땅을 살면서도 한 발은 교회 안에 두고, 또 다른 발은 민족의 강에 발을 담그고 계시던 그런 분인데" 라고 말했다.


양전백 목사는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한국인 최초의 목사 7명 가운데 한명으로 길선주 목사와 동기생 이었다.


일제가 민족운동을 탙압하기 위해 조작했던 105인 사건에 연루돼 2년동안 복역했다.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기억기념분과 윤경로 위원장은 "굶긴다든지, 또는 잠을 안 재운다든지, 그 다음에 이제 여러 가지 방법들. 그 당시 고문 방법만 72가지가 동원됐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아주 심한 고문 속에서 허위죄를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던." 라고 말했다.


191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평북노회장, 1916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지난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사람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권유받고 지체없이 서명했다.


윤 위원장은 "기독교계의 어른이고 대표가 되는 분이죠. 그러니까 이런 분이 대표로 들어가야 말하자면 좀 더 설득력도 있고 힘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이분은 선우혁의 얘기를 듣고는 큰 주저함 없이 대표를 내가 하겠다 이렇게 참여해서 그래서 참여하게 되신 분이죠." 라고 말했다.
양전백 복사는 당시의 다른 민족주의자들처럼 교육사업을 펼쳤고 고아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민족을 사랑한 목회자로 평가받고 있다.


윤 위원장은 "부흥사가 됐든 또는 학교 선생을 했든, 그들이 하는 메시지 속에는 늘 민족사랑, 애국정신 이런 것이 늘 들어 있었죠. 그리고 이분들이 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교세를 확보한다. 나의 어떤 개인적인 그런 인기를 영합한다 이런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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