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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내가 집에서 중얼거리는 노래가락이 있다. “아모레 파티, 아모레 파티”란 말이다.


이달 고등학교 총동문회 행사에서 동기들이 함께 부를 노래라며 열공 중이다.


난 아모레 화장품 회사에서 파티를 열 때 부르라고 만들어 준 노래인가보다 그랬다.
잘 들어보니 아모레가 아니라 아모르였다.


아모르 파티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의문이 생겨 슬쩍 인터넷을 검색을 해보니 아! 이건 그 이름도 유명한 니체 선생이 하신 말씀이 아닌가?


니체가 그의 저서 ‘즐거운 학문’에서 처음 사용하여 유명해진 어구라고 한다.


영어인줄 알았는데 천만에! 라틴어였다. 라틴어로 아모르(Amor)는 사랑이란 뜻이고 파티(Fati)는 운명이란 뜻. 그러니까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그럴듯한 철학적 용어였다.


영어로는 Love of Fate, 좀 유식한 척 문자를 섞는다면 ‘운명애’란 뜻이다.


가수 김연자가 불러서 중장년층에서 인기가 높다는 대중가요에 니체가 쓴 라틴어가 버젓하게 제목으로 등장했다니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고통과 상실, 사소한 일과 중대한 일,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포함하여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되 그 운명에 굴복하거나 순응하기 보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책임 있는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라는 뜻에서 니체가 던진 말이라고 한다. 


운명하면 생각나는 게 ‘시지프스’다. 그리스 고린도에 가면 이 도시를 압도하고 있는 산 하나가 버티고 서 있다. 이 산을 외면하고는 결코 살수 없을 것이란 위압감이 느껴지곤 한다.
이름은 아크로코린트 산. 이 산 정상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다.


이 산에 얽힌 신화가 바로 시지프스의 신화다. 한때 이 고린도의 왕이었던 시지프스는 거만한 태도로 신들을 무시하다가 미움을 사게 된다. 드디어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인 죄로 형벌을 받게 되는데 그 형벌은 무거운 돌을 끊임없이 아크로코린트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것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용한 노동만큼 가혹한 형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신들이 고안해 낸 초강경 형벌이었다.


고통스럽게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고린도에 갈 때 마다 그 높은 산을 바라보노라면 당연히 시지프스가 떠올려진다.


니체와 ‘같은 과’에 속했던 까뮈는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가련한 시지프스와 동일한 인간실존임을 우리가 자각하게 될 때 세상은 부조리 투성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이 부조리를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통해 도피하는 방법, 또 하나는 시지프스의 ‘고귀한 성실’을 본받아 노력하는 것 자체에 삶의 의미를 두는 2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지프스가 무거운 돌을 혼신의 힘을 다해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노력과 투쟁은 바로 신들에 대한 간접적 승리라고 말하고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둘 다 인본주의 냄새가 확 풍기는 철학적 사고가 아닌가? 우리는 죽으나 사나 태생부터 신본주의다.


적극적이고 현세주의로 느껴지는 아모르 파티도 그렇고 형벌인 것 같으나 오히려 그 형벌을 묵묵히 수용하고 받아들임으로 신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시지프스의 운명론도 우리에겐 오답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인생이란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 그냥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모든 게 하나님의 면밀한 계획이었다는 말이다.


내가 금수저로 세상에 태어난 것도 그분의 계획이고 흙수저로 태어나 고생 고생하는 것도 그 분의 계획이라고 믿는 것이다. 내가 한국 땅에 태어나 미국 이민자로 살아가는 것도 그 분의 계획이고 인종차별이 심한 이 땅에서 유색인종으로 살아가는 서러움도 모두 그 분의 계획이다.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르지 않는가? 시지프스처럼 평생 같은 일을 반복하며 마치 노동의 노예가 되어 의미 없게 살아가는 척 보일지라도 이를 형벌이라 생각하거나 신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불러주신 자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런 소명의식가운데 나를 불러주신 자리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헬렌 켈러는 보지 못하고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3중고의 장애를 안고 살아갔지만 그 고난의 자리마저도 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리로 받아들여 작가, 교육자, 사회운동가로 공헌하면서 마침내 운명을 극복한 전설이 되었다.


김연자의 노래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돼/이제는 더 이상 슬픔이여 안녕/왔다갈 한번의 인생아/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돼”
한번 살다가는 인생인데 가슴 뛰는 대로 살라고 노래하고 있으니 현세찬미가처럼 느껴진다. 니체의 말 때문에 괜히 유행가 제목을 놓고 길게 시비를 건 셈이 되었다. 결국 아모르 파티가 아모르 데우스(Amore Deus, 라틴어로 ‘데우스’는 하나님이란 뜻)로 거듭나지 않으면 그건 ‘허무가’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아내에게 동창회 무대에서 신나게 노래 부를 때 ‘파티’대신 ‘데우스’를 외쳐보라고 주문하면 동창회에서 쫓겨날 일 있냐고 아마도 핀잔만 줄 것 같다.


<크리스찬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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