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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은 박인비의 주말이었다. 


그야말로 골프공 하나로 ‘인비천하’를 이룬 셈이다. 


지난 15일 뉴욕 해리슨에 있는 웨스트체스터 골프장에서 열린 금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두 번째 메이저 대회인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에서 박인비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그냥 메이저 대회 우승이 아니라 수많은 기록을 갈아치운 대박이었다.


우선 여자프로골프 세계 1위 자리를 탈환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리디아 고에게 하나 뒤진 2등이었다.


메이저 대회 연속 3연승이란 것도 얼마나 놀라운 기록인가? 


이 대회에서 지난 2013년, 2014년, 그리고 금년 2015년까지 단일대회에서 내리 3년을 우승해 버린 것이다. 


이런 기록은 골프역사상 1937~1939년 패티 버그(타이틀홀더스 챔피언십), 2003~2005년 안니카 소렌스탐(LPGA챔피언십)에 이어 세 번째 기록이라고 하니 이게 보통 일인가?


LPGA에서 뛰기 시작한지 15번째 우승이자 메이저 대회만 이번이 6번째. 그러니까 박세리의 5번째 우승을 뛰어 넘어 이미 ‘골프의 전설’이 되어 가고 있는 박인비는 이번 상금 52만 달러를 보태 상금 부문에서도 세계 1위, 아시안 선수로서 최다우승기록 등 수많은 기록을 갈아치운 셈이다.


박인비와 한조를 이룬 김세영이 계속 따라 붙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두 태극낭자들은 전국으로 방영된 NBC-TV를 통해 푸른 골프장을 누비며 마음껏 대한민국을 PR하는 날이기도 했다. 


무슨 일로 대한민국의 여자 2명을 미국의 전국구 방송이 그렇게 한나절을 할애하여 비춰 줄 수 있을까? 


메르스 때문에 구겨진 대한민국의 체면을 조금은 살려낸 것 같기도 했다.


이 정도라면 박인비는 18번홀 그린에서 대굴대굴 둥글며 기뻐했어야 할 것이다. 


사실 롱 퍼트를 성공시켜 버디를 잡는 순간 폴라 크리머 같은 미국 선수들은 너무 반가워서 토끼처럼 그린 위를 뛰어 다니는 모습을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그런데 박인비는 그런 감정의 기복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버디를 잡아도 잡았나 보다, 볼이 벙커로 곤두박질 쳐도 그랬나 보다, 이기면 이겼나 보다, 지면 졌나보다, 그런 식이다. 


 



흥분하는 법이 없다. 


승리와 실패의 오르내림이 얼굴에서 느껴지지 않는다. 


한결같이 진지하고 조용하고, 한결같이 절제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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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번 홀에서 마지막 버디를 잡아 19언더파를 기록하며 승리가 결정되는 순간, 보는 사람들마저 코끝이 시큰할 정도의 감동의 순간이었다. 


하물며 주인공이라면 어땠을까? 


그런데 박인비는 그냥 한손으로 퍼터를 쥔 채 두 손을 높이 들어 만세 부르는 모습이 전부였다.


경기도중 경기를 중계하던 방송의 해설자가 박인비는 이길 때도 그 표정, 질 때도 그 표정, 늘 같은 표정을 유지해오는 선수라고 말하자 다른 해설자는 프로로 입문하면서 모든 프로 골퍼들은 그런 훈련을 받는다고 덧붙였다.


 아무리 프로 입문 때 표정관리 훈련을 잘 받았다 해도 세계 1등을 다시 탈환하는 순간에는 신나게 춤을 추던지 호탕하게 웃어 볼 법도 하다.


그 넘치는 기분을 안으로 쓸어 담아 승자의 영광을 절제하려는 그 겸손한 모습에서 나는 박인비야말로 ‘골프여제’란 말이 어울리는 선수라고 생각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어느 날에는 파3에서 홀인원을 하는 대박 나는 인생을 경험할 때도 있다. 

홀인원이란 평생에 한 번도 어렵다는 행운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날 박인비처럼 ‘보기 프리’에 줄 버디를 잡아내는 잘 나가는 때도 있다.


그러나 때리는 공마다 트러블 샷이 되고, 러프에 빠지거나 재수없이 벙커에 빠지는 경우도 만난다. 물에 빠지는 공은 또 얼마나 많은가? 


플레이가 금지되어 있는 OB(Out of Bounds)로 볼을 쳐버리는 날에는 2벌타를 먹게 되어 앞길이 캄캄해 질 때도 있다. 


그런 경우라도 진정한 프로라면 골프채로 땅을 후려치거나 혼자 욕을 하면서 중얼거리지는 않는다. 


골프장에 나간 갤러리나 TV로 게임을 시청하는 사람들은 실패하는 순간의 골퍼의 매너까지도 관람의 대상이라 여기고 돈 주고 입장표를 사거나 시간을 투자하여 TV를 보는 것이다.


우리도 프로처럼 살자. 너무 한 번의 승리에 도취되어 세상을 우습게보지도 말고, 좀 안 풀린다하여 인생을 다 산 것처럼 주저앉지도 말자.


사실은 인천공항,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 김포공항을 빠져나와 이 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예상하고 보따리를 싼 인생의 프로들이다. 


영어를 못해서 꿀릴 만큼 꿀렸고, 때론 자식농사 망쳐서 가슴에 든 멍자국도 있다. 페이먼트가 밀려서 집에서 쫓겨날 때 키워 온 내공도 있다. 


그 정도의 실패는 각오하고 이 땅에 발을 내디딘 우리들이라면 인생길은 늘 페어웨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이다.


승리의 순간, 혹은 실패의 순간에도 흔들림이 없는 ‘박인비 표’ 프로근성을 발휘하며 겸손하게 살아가자. 벙커를 두려워하는 자가 결코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는 없다.


<크리스찬위클리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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