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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은 좋은 것이다.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사랑을 배운다. 


사랑인지 아닌지를 따져보는 기준이 있다. 


무엇인가를 거저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그건 틀림없는 사랑이다. 


거저 주는 것이 선물이다. 


바꿔 말하면 선물이 없다면 그건 사랑도 아니다.


그런데 선물을 위장해서 주고받는 뇌물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선물과 뇌물의 극명한 차이는 대가성이다. 대가를 바라고 주면 뇌물이다. 


받고 나면 부담이 생기고 대가를 거절할 경우 싸움판이 벌어지고 법정까지 간다.


목사님이 장로를 시켜준다고 돈을 받았다고 하자. 그건 뇌물이다. 


그런데 장로투표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 화살이 목사에게 간다. 


돈 먹고 장로 안시켜 준다고 노발대발 화가 난 장로후보자는 목사가 돈밖에 모른다고 험담을 하고 다닌다. 


받는 사람에겐 선물이었지만 준 사람은 뇌물이었다. 


결국은 사이좋던 둘 사이가 원수지간이 되고 만다.


뇌물은 이렇게 인간관계를 망가트리고 교회의 신뢰도를 추락시키는 마귀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뇌물이란 흙탕물보다 더 구린내가 나는 정치판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다. 거룩한 주님의 공동체에서 뇌물이란 말은 존재해서도 안되고 주고받아서도 안 될 일이다. 


돈에 환장해서 주님을 팔아먹은 가롯 유다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뇌물만 있는가? 


그럴듯하게 포장된 경품이란 것도 있다. 


이것도 문제다.


지난주 한국에서 모 교단의 기도회가 열렸는데 끝나면서 경품행사를 벌인 모양이다. 


기도회에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경품전략을 쓴 것이다. 


경품액수가 무려 7천만 원이었다고 밝혀지자 이게 도마에 올랐다. 


도마가 있다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도마에 올라도 당연한 것은 미국 돈으로 7만 달러 규모의 경품을 걸었으니 이게 정신 멀쩡한 그리스도인들이란 말인가?


한국교회가 외형적으로 커지면서 각종 행사를 진행할 때마다 물량공세의 규모도 대단해졌다. 


최근엔 총회나 기도회 행사에서도 상당한 액수의 경품이나 거액의 현금이 경품으로 제공되고 있다 하니 이걸 놓고 물질만능이란 말로는 성이 안찬다. 


돌아버린 것이다.


말썽이 된 행사의 경품시간에 수천만 원의 현금이 전달되었는데 현금 5백만원 2명, 천만원 1명, 이어 1명에게는 현금 3천만원이 경품으로 주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급된 경품 현금 총액은 7천만 원. 


기도회 끝내놓고 캐시 박치기 경품 장사를 한 것이다.


이를 지켜본 개척교회 목회자들, 백만 원도 안되는 쥐꼬리 월급으로 허덕이며 살고 있는 미자립 교회 목회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니까 이 기도회는 결국 어려운 교회 목사들 기죽이기로 피날레를 장식한 셈이 되었다.


어디 거기 뿐이겠는가? 


개교회의 총동원전도주일이나 부흥회, 총회 등에서도 빈번하게 볼 수 있는 게 경품행사요, 몇 년 전 모 교단 총회에서는 승합차 1대와 승용차 1대, 노트북 10대가 경품으로 제공되기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뇌물은 물론이지만 사행심을 조장하는 이런 경품이란 것도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주님의 백성들을 추하게 만든다.


그러나 선물은 많을수록 좋다. 


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난 주일 나는 어느 교회 임직식에 참석했다. 


은퇴하는 장로님이나 새로 장로에 취임하는 분들의 간증이 감동적이었다. 


예배가 끝날 무렵 오늘 임직을 축하하러 오신 모든 참석자들에게 선물을 준비했으니 하나씩 받아 가시라고 담임목사님이 광고를 했다.


“우리 교회에서는 임직식을 거행하면서 참석자 여러분에게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다름아닌 우산입니다. 지금 우리 캘리포니아는 가뭄 때문에 비상절수령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우산을 들고 비를 맞는 날이 빨리 오도록 하나님께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멘트와 아이디어가 모두 짱이었다.


여러 교회 임직예배에 참석한 후 컵이랑 볼펜, 수건 등을 선물로 받아 보았다. 


그러나 우산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정성, 선물에서 정성이 느껴졌다.


주일 오후가 아니라 주일예배시간에 임직식을 가진 것도 좋았다. 


억지로 사람을 불러 모으겠다는 허영심이 없어 보였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화환도 사양했다. 그러나 직분을 받는 기쁘고 거룩한 자리에 동참해준 분들에게 전하는 선물에서는 진정한 감사와 온정이 느껴졌다.


이런 따뜻한 선물까지를 교회개혁의 대상에 끼워 넣는다면 그건 너무 야박하다. 


임직식이 끝나고 전달되는 선물은 7천만 원 현찰 경품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다. 


그것마저 신성한 교회의 타락이라고 째려본다면 그런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의 병적인 결벽증이 오히려 치유되어야 옳다.


깡마른 이민생활하면서 교회에서 오가는 정마저 느낄 수 없다면 우리가 사는 곳은 늘 ‘데스밸리’나 다름없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비가 오는 날엔 선물 받은 그 우산을 들고 나갈 기대감에 가슴이 설렌다. 


그 교회 목사님 말씀대로 우선은 가물어 메마른 땅에 비를 좀 내려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먼저 일 것 같다.


임직식에서 받은 선물 때문에 이렇게 기분 좋게 흥분하기는 처음이다. 

그래서 선물은 좋은 것이다.


<크리스찬위클리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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