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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일본에서 사역하시는 한분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의사 부부로서 1990년대부터 일본 선교에 관심을 갖다가 병원 문을 뒤로하고 최근에 일본으로 달려갔습니다.
사람을 고치는 의사 직에서 영혼을 고치는 선교사로 변화한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 드리고자하는 것은 흔히 이것저것 하다 안 되면 목사로 갑자기 둔갑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들이 일본선교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본은 1945년 패전 후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선교사 비자가 정식으로 나오는 문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패전 당시 0.9%였던 기독교 인구가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0.9%, 아니 오히려 조금 줄었다고 합니다.
일본 기독교가 부흥이 안 되는 이유는 참으로 많이 있는데 이유가 거의 절대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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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없고 그저 신이라고만 부르며, 따라서 유일신 사상이 없고, 기독교 위에 국가, 천황이 자리하며, 조상 숭배 사상이 뿌리 깊고, 집단의식은 있으나 죄의식이 없으며, 에도 시대 300년에 걸친 지속적이고도 모진 기독교 박해 정책으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두려움이 국민 정서에 뿌리박힌 것, 죽은 조상을 무서워하며 집안의 종교를 결코 배신하지 못 하는 것 등등…..
그런데 그분은 이메일의 끝 부분에 가슴 철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잔혹한 지배를 받았던 우리 민족이기에 일본을 말끝마다 욕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일본제국의 심한 박해를 받은 한국 교회 역시 “일본이 망할 것이라고, 또 망해야 한다고” 심지어 목사님들께서 그렇게 설교하면서 한 편으로는 “일본인들을 사랑한다.” 고 전도지를 나누어 주며 복음을 전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우리들의 행동은 결국 우리가 가지고 가는 예수의 복음은 아무리 전해도 그들이 받아먹을 수 없는 ‘못 먹을 떡’이라는 것입니다.
왠지 삼일절 92주년을 맞이하면서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떡 5개로 5000명을 먹이고, 떡 7개로 4000명을, 떡 20개로 100명을 먹이고(왕하 4:42-44) 남았던 기적을 수학의 순열로 계산하면, 하나의 떡인 예수님은 역사상의 모든 인류를 먹이고도 남는 생명의 떡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과 속이 다른 행동으로 먹지 못하는 떡만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그처럼 사랑받던 가룟 유다가 밤이 새도록 피땀 흘리며 기도하고 내려오시는 예수님의 목을 끌어안고 “선생님 안녕하시옵니까?”라고 입을 맞춘 모습은 역사 이래 가장 무서운 표리부동, 겉과 속이 다른 연출로 그의 손에는 먹을 떡 대신 먹지 못할 은 30냥만 쥐고 있었습니다.
어디 가룟 유다만 그렇겠습니까? 부흥회, 혹은 기도원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는 혼자 받듯 두 손 들고 눈물 쏟으면서 주여! 주여! 외치던 사람이 좁쌀만 한 이해관계에 걸리면 부끄러운 언행을 서슴없이 연출하는 경우 역시 우리들에게서 과연 어떤 떡을 이 시대에 줄 수 있겠습니까?
이번 사순절 기간에 못 먹을 떡이 아닌 생명의 떡을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회개와 성령운동이 교회마다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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