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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경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신학과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나는 솜사탕을 입에 대지 않았다. 솜사탕은 ‘사탕’이 아니라 ‘솜’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학교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솜사탕을 사달라는 성화에, 난생처음으로 솜사탕을 샀던 기억이 있다.
아들의 유혹으로 그것을 한 조각 입에 넣었고, 솜사탕은 솜이 아니라는 명백한 진리를 깨달았다.
어릴 적 솜틀집을 본 적이 있었다. 솜틀집에서는 눌려 딱딱해진 솜을 다시 부풀려 새털처럼 가볍게 만들어냈다. 솜사탕을 만드는 조그만 통을 볼 때마다 늘 그 솜틀집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래서 설탕을 한 줌 넣고 돌리면 그 ‘설탕’이 솜사탕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놀라웠다. 솜의 모양을 한 그것이 솜이 아니라니! 솜이 솜사탕으로 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본질의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솜사탕을 만드는 것은 솜이 아니라 설탕이니, 설탕에서 솜사탕이 나오는 것은 본질의 변화가 아니다.
솜사탕처럼, 태초에 있었던 말씀으로서의 예수님, 근본 하나님의 본체였던 예수님,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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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을 입었고,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다. 그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모양을 바꾸어 우리 곁에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해마다 돌아오는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이러한 변화를 감사하는 날이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과의 동등함을 취하지 않고 인간의 모양을 입으신 예수님의 낮아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구원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물었다. “물이 비에 젖습니까?” 질문을 받은 사람이 대답했다. “젖지요” 그러나 질문자가 원했던 답은 “물은 비에 젖지 않는다”였다. 물은 자신이며, 비는 환경이고 조건들이고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질문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면, 어떠한 외부적 환경의 변화에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의미를 ‘물은 비에 젖지 않는다’라는 말 속에 담고 싶어 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 또한 ‘물은 비에 젖지 않는다’라는 말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을 믿을 때 잃지 말아야 하는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
끊임없이 우리를 요동치게 하는 빗속에서 우리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는 것,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탄생 속에서 변하지 않는 본질로 숨겨진 것을 찾아내는 것,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이것이 아닐까 한다.
‘한’날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한’날의 의미로, 예수님처럼 ‘비에 젖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평생을 그려보는 것, 그것이 크리스마스의 본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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