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신학자 주선애 교수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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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을 복음의 열정 하나로 가난한 사람을 섬기며 살아온 주선애 교수. 새로 시작하는 탈북자 프로그램을 구상하며 주교수가 사색에 잠겨 있다.


크리스천의 검소한 삶이란 이런 모습일까. 현관을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거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집 주인이 한발 앞서가며 재빨리 불을 켰다. 거실 한편에는 흰색이 누렇게 바랜 30년 이상 된 선풍기, 성경이 놓인 낮은 탁자, 성경문구가 적힌 낡은 벽걸이 액자, 저렴해 보이는 책상과 의자, 오래된 가죽 소파, 녹슨 고가구. 노신학자의 삶이 묻어나는 소박한 가재도구들이 놓여 있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반가이 손님을 맞는 주선애(86·서울 길동) 장신대 명예교수의 노년의 삶의 단편들을 엿볼 수 있었다.
서울 망원동에 살며 그도 한때 화려한 가구를 사들이고 집을 멋있게 꾸몄다. 홍수가 두 번 들었다. 하나님께 손들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아님을 알았다. 그 후론 재활용 가구들을 쓴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기독교교육학 교수로서 특별한 영성을 갖고 목회자들과 많은 학자, 전문가를 길러낸 주 교수의 삶이다.
그는 만 22년을 재직한 장신대에서 1989년 퇴임했다. 그러나 후학들에 대한 사랑과 복음 열정은 식지 않았다. 경기도 포천의 은성수도원을 인수, 장신대에 경건훈련원으로 기증했다. 현재 이곳은 신학생들의 영성훈련장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집과 재산을 모두 학교에 기증했다.
2002년에는 같은 고향 사람인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만나면서 탈북자 지원에 적극 나서게 됐다.
“탈북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들의 정착을 돕는 것이 사명임을 깨달았어요. 저 또한 공산당의 기독교 탄압을 피해 남한으로 탈출한 탈북자이기도 하고요.”
주 교수는 평양 시내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증조부가 예수를 믿는 한국 초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신앙심이 깊은 할머니와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 4대 크리스천이다. 외동딸로 조부모와 부모의 무한사랑을 받으며 부요하게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생후 18개월 되던 해에 돌아가시고 조부모도 병이 들면서 갑자기 궁핍해졌다. 아버지는 “선애는 여자 아이지만 기독교 선생이 되게 해주시오”라고 유언했다. 어머니는 고무신 공장을 다니면서 공부를 시켰다. 늘 새벽기도를 다니며 딸이 훌륭하게 성장해 좋은 기독교 교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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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아버님의 유언에 따라 딸을 기독교교사로 훌륭히 키워낸 어머님의 진갑을 기념하여 사진을 찍었다(왼쪽). 지난해 장신대 경건훈련원을 방문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주 교수.


주 교수는 중학생 때 가가와 도요히코의 ‘사선을 넘어서’란 기독교 사회운동 책을 읽고 감명받았다. 그는 “삶이란 섬기는 것이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사는 것이지 나 혼자만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라며 인생의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여학교 졸업후 농촌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그는 봉사만 하면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봉사할 일을 찾다 무의촌 사람들을 돕기 위해 산파를 선택했어요. 독학으로 산파면허증을 땄어요.” 교회 교인들을 무료로 도와주었다.
단 둘이 외롭게 살던 어머니는 주 교수의 결혼을 서둘렀다. 주 교수는 최기호 전도사와 결혼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신학교에서 철야기도를 하다 구속의 확신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다. 공산당의 눈을 피해가며 부흥회, 주일학교 집회 등을 인도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결국 48년 천신만고 끝에 남한으로 내려왔다. 남편은 경북 영덕에서 목회하다 주 교수가 25세 되던 49년 갑자기 작고했다.
상심에 빠진 주 교수는 신학교 교장인 박형룡 목사의 추천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공부를 마치고 숭실대에 기독교교육학과를 개설, 6년간 가르쳤다. 66년부터 장신대에 재직했다.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돌볼 것을 강조하며 가슴에 담긴 지식을 가르쳤다. 70년대 망원동에 살며 빈민선교를 학생실습으로 연결시켰다. 김동호 정태일 하용조 한인수 목사, 오인탁 이광선 임창복 교수 가 그의 제자들이다.
기독교 교육을 삶 속에서 실천하던 그는 이제 통일을 준비하고 있다. 하용조 목사의 도움으로 탈북자의 정착을 돕는 탈북자종합회관을 운영했다. 그를 보고 ‘높은뜻교회연합’ 김동호 목사는 교회 건축자금으로 탈북자들의 직업을 만들어주기 위해 공장 5개를 세웠다. 영락교회 권사인 그는 지난 7월 영락교회 내에 탈북자 문제를 전반적으로 다루는 남북평화신학연구소를 설립했다. 19일부터는 하나원 입소 탈북자들의 문화적 충격을 줄여주기 위해 ‘새생활체험학교’를 열 계획이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통일세에 대해서는 “통일세뿐 아니라 통일헌금도 내야 한다”며 “통일을 준비하며 한달에 만원씩 저축하는 운동을 벌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선행돼야 할 것은 한국교회가 탈북자 돕기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이해해야 선교도 교육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하루에 두 번 20분씩 집 앞 산책로를 걸으며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는 주 교수는 사람을 섬기며 사는 요즘이 가장 행복하고 기쁘다고 말한다. “우리를 섬기러 오신 주님처럼 섬김의 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주 안에서 가치있는 삶입니다.” 평생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살아온 노 신학자의 고백이 가슴에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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