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피해온지.JPG

‘해방교회’

고난이며 축복의 교회 이름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북한 땅을 출애굽한 크리스천들. 
곧 고향 땅 어머니 교회로 돌아갈 줄 믿고 38선을 넘었다. 

그리고 해방군 미군으로부터 천막을 얻어 남산 자락에서 예배를 드렸다.
47년 7월의 일이다. 

2014년 8월 10일 주일. 

서울 용산구 용산2가 그 남산 자락 천막교회서 출발한 해방교회 성전은 웅장한 석조건물이다. 
멀리 한강이 도도히 흐른다. 

출석교인 1500여명에 이른다. 설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해방촌’의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역할을 한다. 

한때 서울의 5대 대형교회였다. 


서울 해방촌, 남산 아래 우뚝한 석조 성전

속칭 해방촌은 해방과 6·25 전쟁 직후 북한의 종교 탄압을 피해 월남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김일성이 교회를 폐하고, 크리스천을 탄압하자 엑소더스한 이들이 지금의 해방촌 오거리를 중심으로 미군 폐자재와 버려진 판자 등을 주워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이들 대개는 평안도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 복음이 융성했던 선천군 교인이 많았다.
평양, 선천, 의주, 용천 지역은 한국 개신교 복음 전파의 북방경로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광복, 즉 해방이 디아스포라의 삶을 만들지 아무도 몰랐다. 

이범선 소설 ‘오발탄’(1959)은 바로 이 해방촌을 무대로 실향 가족의 비극을 잘 다룬 작품이다. 

계리사 사무실 서기 철호는 치매 걸린 노모, 만삭의 아내, 영양실조 걸린 딸, 상이군인 동생 영호, 양공주가 된 여동생 명숙 등과 해방촌 판잣집에서 살아간다. 

노모는 시도 때도 없이 “가자! 가자!”하며 소리를 질러댄다. 

분단으로 갈 수 없는 고향인데도 어머니의 의식 속엔 그곳이 예루살렘인 것이다.

뿌리 뽑힌 자의 가난은 동생을 권총 강도로 만든다. 

아내는 가난에 손도 못쓰고 난산 끝에 죽는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가자! 가자!”를 연발할 뿐이다. 이 남루한 해방촌을 떠나 어디로 가잔 말인가.
철호는 영호가 “이 비참한 현실에 양심이 무슨 소용이냐”고 소리치지만 그는 양심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는 “나는 하나님의 오발탄이냐”며 구원을 바란다. 
이 단편은 지금 수능 시험을 위한 필독 작품이 됐다. 

그러나 작품 속에 녹아든 해방촌이 디아스포라 백성의 울부짖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모른다. 


“가자!가자!” 실향민 1세대의 별세

지난 13일 서울 순천향병원 영안실. 

해방교회 초기 성도 이두칠 원로장로가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황해도 봉산이 고향인 그는 월남 후 평화건업(롯데건설 전신)을 세워 근대화의 상징 경부고속도로 등을 닦기도 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대구로 피난 갔다가 부흥사 이성봉 목사(1900~1965)의 설교를 듣고 회심, 해방교회를 섬기기 시작했다.

이날 고인의 아들 이영용(71) 원로장로는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그 옆에는 그와 함께 해방교회 유년부 시절부터 함께한 장인환(69·전 신일학원 이사장) 장로가 있었다. 

그리고 박영국(53) 해방교회 담임목사, 고인의 사위 정경진(77) 전 뉴욕한인회 사무총장 등이 위로예배에 참석했다. 

정씨는 미션스쿨 대광고의 교사였던 이범선으로부터 직접 배운 학생이기도 했다.

“해방촌 1세대 부모님들은 교회를 먼저 세웠어요. 우리를 등에 업고 남부여대 하여 내려와 해방촌에 정착, 남대문교회와 베다니교회(영락교회 전신)에서 주일성수했지요. 
베다니교회는 이북 분들이 많아 해방촌 교인들이 남산을 넘어 다니곤 했습니다.”

장 장로가 선대의 신앙을 흑백사진 보여주듯 설명했다. 

그리고 47년 3월 해방촌 한 가정집에서 27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고, 7월 자생 해방교회 머릿돌을 올렸다. 

이 과정에서 남대문교회 여전도회의 지원이 컸다. 

그렇게 교회가 설립되자 이북서 교회에 다니던 크리스천이 밀물 듯이 몰렸다.


“이북의 양떼 버린 내가 또 버리리까?”

한데 그 머릿돌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모두가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허은 목사(1913~?)는 피난 권유에도 해방교회당을 지켰다. 

“이북의 양떼(평북 철산 풍천교회)를 버리고 온 내가 또 다시 양떼를 버리고 피난 할 수는 없소. 
나는 본시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 당신들이 자꾸 피난을 권유하면 마음이 흔들릴지도 모르니 절대로 나에게 피난을 권유하지 마시오. 
나는 끝까지 이 제단을 지킬 것이오.”

안타깝게도 그는 50년 7월 25일 새벽 인민군에 납치된 후 행방을 모른다. 

그의 아들 허전(전 보성여고 교장)은 지금 이영용 장인환 등과 함께 원로장로가 됐다. 

전쟁 직후. 해방교회는 성경구락부(비인가 초등과정), 해방고등공민학교(중등과정), 해방모자원과 탁아원(현 해방어린이집 전신) 등을 운영하며 지역공동체의 샘물이 됐다. 

청교도적 삶과 실향민 특유의 성실함은 교회를 부흥시켰다. 

60~70년대 경제개발 이후 이농자가 몰렸고 그럴수록 교회는 구원의 성소가 됐다.

한때 강남개발 붐과 함께 시내 여러 교회가 강남으로 이전할 때도 그들은 ‘양떼’가 있는 해방촌을 버릴 수 없다며 그 자리를 고수했다. 

앞으로도 말이다. 

<국민일보 미션>

한국교계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