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서울 도심을 배경으로 교회 탑 십자가 불빛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세상 곳곳에서 지쳐 쓰러져 가는 이들이 이 십자가를 보며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길 기도해본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36년 프랑스는 국경에 독일의 침공에 맞설 방어선 ‘마지노선’을 구축했습니다. 마지노선의 이름은 방어선 구축을 제안한 앙드레 마지노 장군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마지노선은 9년여의 건축 기간과 당시 160억 프랑(현재 가치 약 21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됐다고 합니다.

최근 이 마지노선을 생각나게 하는 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지난 6월 전남 완도군의 한 앞바다에서 열 살 조유나양이 부모와 함께 숨진 채로 발견된 사건입니다. 이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습니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아이를 죽음으로 내몬 부모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비난하기 이전에 자식과 함께 극단적 선택을 앞둔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를 잠시 헤아려 봤습니다. 사건을 조사한 경찰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한 달간 이들 가족 세 명의 휴대전화 송·발신 내역을 분석한 결과 발신 전화는 각각 5건 안팎으로 파악됐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들 가족은 생전 주변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생활을 이어갔던 것입니다.

마지막 가는 길조차 배웅해줄 변변한 친척 하나 없다고 알려진 이들에게 교회가 최후의 보루, 마지노선이 됐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봅니다.


과거 한 연예인과 인터뷰했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의 남편을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갔고, 얼굴이 알려진 그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슬픔에 빠져 정처 없이 길을 떠돌던 그는 십자가만 보고 무작정 한 교회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홀로 기도하며 큰 위안을 얻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와 사이비·이단 종교 문제로 교회 출입이 쉽지 않은 요즘입니다. 누구나 들어와서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현실은 안타깝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재물 파손과 도둑에 대한 염려보다 세상에서 소외되고 낙망한 이들을 품는 것을 더 우선시해야 합니다. 국가와 사회 시스템이 소외된 이들을 위한 그물과 같은 기초 제도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면, 교회는 그 그물망 사이로 빠져나간 이들이 망망대해로 표류하지 않도록 막는 최후의 보루가 돼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많은 교회는 지금도 사회 구제사역에 힘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물질적 지원에만 그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실질적인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일에 더 힘써야 합니다.

프랑스가 구축했던 마지노선에는 구멍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벨기에와 인접한 국경이었습니다. 독일은 이 벨기에 국경을 통해 프랑스를 침공했고, 결국 마지노선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교회’의 탈을 쓴 이단·사이비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또 세상은 교회에 이단과 너희가 뭐가 다른지 물으며 교회를 등지고 있습니다. 촘촘히 방어선을 구축해 세상을 품어야 하지만 마지노선처럼 빈틈이 생긴 것이지요.

교회의 역할과 해법을 고민하던 제게 과거에 만났던 사회복지사 한 분이 떠올랐습니다. 2020년 많은 이를 안타깝게 한 ‘방배동 모자 사건’입니다. 사회복지사이자 개신교인이었던 정미경씨는 발달장애를 앓고 홀로 길에서 노숙하던 A씨를 눈 여겨봤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이는 숨진 지 반년 넘도록 집에 홀로 방치됐던 A씨의 어머니를 발견하는 일로 이어졌고, A씨 역시 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반추해보며 세상 곳곳에 퍼진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역할과 과제를 생각했습니다.

“이제 물이 찼다.” 바다로 차를 몰기 직전 조양 부모가 서로 나눈 마지막 대화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조금만 더 사회의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의 대화는 “이제 좀 살겠다”로 바뀌지 않을까요.

 

<국민일보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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