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에 무안 참사까지… 고통의 시대,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따뜻한 손으로 위로를, 그렁그렁한 눈으로 함께 울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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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안 제주항공 참사 발생 다음 날인 지난달 30일 전남 무안 스포츠파크에 차려진 합동 분향소를 찾은 한 시민이 조문하면서 얼굴을 감싼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흉흉한 슬픔이 대한민국을 누르고 있다. 2024년 연초부터 극단적 대결과 혐오와 혼란이 계속되더니 비상계엄 선포로 정점을 찍었다. 

거기에 대형 참사가 더해졌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통곡 소리가 하늘을 떠돌다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내려와 얹힌다.

들뜬 송년회와 연하장과 새해 덕담은 사라지고, 대신 분노와 불안이 반씩 섞인 한숨 소리뿐이다. 

든든하다고 믿었던 우리 삶의 기반이, 민주공화국의 정체와 질서가, 흔들리고 뽑혀 나가는 느낌이다.

고통의 때를 지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걱정이 더 깊다. 

보수·진보 대립의 불똥이 행여 성도의 교제를 해치지 않을까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목회자가 말 한마디, 단어 하나 잘못 사용했다가 성도들의 항의를 받는 일이 다반사다. 

젊은 그리스도인은 한국교회가 극단적 대립의 한 축을 담당한다는 혐의 때문에 숨죽이며 직장 생활해야 한다. 

우리는 무얼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아야 할까.

무엇보다도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참혹한 고통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무얼 하셨느냐는 질문이다. 

전능하고 정의로운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린다면 어째서 악인을 놓아두는 것인가. 

무고한 이들이 참사의 희생물이 될 때 구원자 하나님은 왜 그들을 구하지 않으신 것일까. 

네가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전 7:14, 개역한글) 나는 이 구절이 오늘 우리에게 꼭 맞는 말씀이라고 믿는다. 

오해는 말기 바란다. 이쪽도 일리가 있고 저쪽도 일리가 있다는 훈수 조의 양비론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으니 우리는 기도할 뿐이라는 진부한 클리셰가 아니다. 

행동하지 말고 생각만 하다가 이기는 쪽에 올라타라는 배운 사람의 얄팍한 비겁함이 아니기를 바란다.

지금으로서는 헌정질서를 회복하는 게 급선무인 것이 맞다. 

그러나 헌정질서를 회복한다면 이 소동이 멈출 것인가. 

한 달 전 처음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때는 그 비현실성, 아니 초현실성에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이후 비상계엄조차 입장주의와 정쟁으로 환원하는 것을 보면서(내 진즉에 이럴 줄 알았다!) 이건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풀어야 할 어려운 숙제임이 밝혀졌다. 

소위 ‘87체제’의 모순, 더 거슬러 가면 100년 동안 계속된 한반도에서의 이념논쟁이 경화(硬化)되고 흑화(黑化)된 또 하나의 결절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 결절에 한국교회도 자양분을 공급했다.

곤고한 날에 ‘생각’한 사람을 들라면 예언자 예레미야를 맨 먼저 꼽을 수 있다. 

그는 유다 왕조와 성전이 동시에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 원인을 성찰했다. 

멸망의 역사적 근원을 찾아가는 것은 일반 역사가가 하는 일과 유사하다. 그러나 예언자와 역사가는 다르다. 

문제의 근원을 인간성과 영성에까지 파고든다는 점에서 다르고, 역사에서 유리된 객관적 판단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도 역사의 죄악에 연관됐음을 깨닫는다는 점이 다르다. 

백성의 고통을 체휼한다는 점에서도 완전히 다르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차이는 예언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의 입장이나 이념을 강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끌어내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고통이 곧 끝나고 회복의 시기가 금세 도래할 것이라는 거짓 희망을 가볍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위대한 미래를 상상한다. 

유다 왕조와 성전의 타락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다윗을 능가하는 다윗의 후손 메시아, 그림자 성전의 실체인 그분을 예고했다. 

그러나 언제 그 일이 이루어질지 감추어 있기에 예레미야는 눈물 흘리며 엎드릴 뿐이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

과연 예레미야가 예고한 메시아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했을까. 

그는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대답을 주셨을까.

예수님이 고통의 의미와 마주한 가장 인상 깊은 성경은 예수님이 선천적 시각장애인을 고치는 장면이다.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입니까, 부모입니까.” 제자들의 질문은 인과응보의 정당성을 묻는 전통적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질문이다. 

신정론은 선한 신이 다스리는 세계에 왜 악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신을 변호하는 이론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을 게 있다. 

제자들의 질문은 심오하지만 그 태도는 매우 부적절했다. 

한마디로 폭력적이다. 

그 장애인은 앞을 보지는 못하지만 귀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그 고통의 원인으로서 죄를 언급하는 것은 안 그래도 힘든 사람에게 종교적 죄책감까지 얹어주는 꼴이 된다.

사람들은 보통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관대한데, 이런 사람이 인과응보를 말하면 언어폭력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폭력에 길들어졌던 시각장애인은 절망으로 고개 숙였고, 제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가해자가 된 셈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예수님은 신정론을 온종일 설명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 

제자들은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지만 예수님은 손을 뻗어 그의 눈을 만지셨다. 

제자들은 그를 내려봤지만, 예수님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제자들은 그를 잉여 인간으로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그를 하나님의 영을 품은 사람으로 보셨다.

예수님은 신정론을 설파하는 대신 그를 고치셨다. 

눈 모양의 진흙을 붙이자 그 흙에서 세포가 생기고 줄기세포로 분화하여 눈의 기능이 회복됐다. 

창조주 하나님을 본받은 재창조의 사역이다. 그리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했는데, 실로암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물이다. 

실로암이 예루살렘 성 밖에서 흘려보내진 물인 것처럼 예수님도 우주 밖에서 보내졌다. 

그의 재창조 사역이 거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과 고통을 짊어지시고 모든 폭력을 자기 몸으로 흡수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하나님이다. 

강보에 싸인 아기, 그의 따뜻한 손, 눈물 그렁그렁한 눈, 사랑 가득한 미소, 피눈물 흘리는 기도, 십자가 위에서의 절규, 이게 신정론이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폭력을 마주하고 이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교회가 하나님이 세상에 내어놓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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