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
 
 

 

골프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선수권대회인 ‘디 오픈(The Open)’ 150회 대회가 지난주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열렸다. 디 오픈대회는 미국에 ‘US오픈’이 있듯이 브리티시 오픈, 즉 영국선수권대회를 말한다. 이 대회가 열리는 세인트앤드루스는 흔히 ‘골프의 메카’, 혹은 ‘골프의 성지’라고 불리는데 600년 전통을 갖고 있으니 그렇게 부를 만도 하다. ‘킹 제임스 성경’으로 유명한 제임스 1세가 이곳에서 골프를 쳤다니 얼마나 대단한 골프장인가? 그래서 전해지는 말이 있다. “이 세상 골퍼는 딱 둘로 나뉜다. 올드코스에서 골프를 쳐본 골퍼와 안 쳐본 골퍼!” 보통 운동 삼아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을 열 받게 하는 말이지만 그런 줄 알고 지나가는 수 밖에 없다.


2차 대전을 호령했던 미국의 명장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이곳 올드코스 1번 홀 티샷이 너무 부담이 되어 2번 홀에서 첫 티샷을 했다고 전해진다. ‘골프의 성인’이라 불렸던 20세기 최고의 골퍼 바비 존스가 이 코스에서 경기하다 스코어카드를 찢어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디 오픈에서 3번이나 우승한 바비 존스는 그 후 올드코스에서 영감을 받아 마스터스 대회가 열리는 오거스타 내셔날 코스를 만든 장본인이 되었다.


그럭저럭 골프에 관심을 갖고 사는 나는 이번 대회에 2가지 관전 포인트가 있다고 봤다. 첫째는 타이거 우즈가 과연 부활 할 것인가? 둘째는 사우디 국부펀드 후원을 받고 있는 LIV(리브) 골프 소속으로 달려간 선수들과 기존의 미국 PGA에 남아있기로 작정한 선수들의 맞대결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였다.


우선 타이거 우즈는 성공하지 못했다. 컷 탈락을 당했다. 눈물을 보였지만 아직 은퇴는 아니라고 말했다. 돈 많이 준다고 PGA를 배신하고 LIV로 갔다고 욕을 먹던 브룩스 켑카, 필 미켈슨, 우스테이즌, 케빈 나도 컷 탈락. 유일하게 더스틴 잔슨만 10위권에 들었다.

이번 대회 영광의 우승은 호주의 카메런 스미스가 차지했다. 총상금 1천 4백만 달러 가운데 250만 달러를 우승상금으로 챙겼고 그 유명한 ‘클라레 저그(Claret Jug)’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3라운드까지 공동 1위를 달리던 로리 맥길로이는 공동 3위로 경기를 마쳤다.


나는 3라운드 10번 파4 홀에서 벙커에 빠진 공을 세컨샷으로 빼내어 이글에 성공하는 맥길로이를 보며 그가 우승할 것이라 내다봤지만 마지막 날 그 예상은 빗나갔다.

올드코스는 나무가 없다. 워터 해저드도 없다. 바닷가 모래사장 둔덕에 거친 잔디를 깔아 놓은 것 같은 링크코스다. 100야드 퍼팅 그린이 있는가 하면 벙커는 무려 112개가 있다. 한번 빠지면 죽음이다. 사람 키 보다도 더 깊은 ‘항아리 벙커’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강한 바닷바람이 모래를 쓸어가기 쉬우니까 벙커를 아주 항아리 속에 담아둔 셈이다. 그러니 쉽게 눈에 띄지도 않는다. 볼이 안보여서 가까이 가보면 벙커에 빠져있다. 두려운 지뢰밭과 같은 코스다.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도 이 코스에서 경기하면서 “벙커에 안 빠트리는 게 최상책”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올드코스 17번 홀 그린 앞에는 악명높은 ‘로드 벙커(road bunker)’가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혹은 ‘나까지마 벙커’라고도 불린다. 우승유망주였던 나까지마란 사람이 1978년 이 벙커를 4타 만에 겨우 탈출하여 9타 만에 홀아웃 한 것이다. 2005년 최경주 선수도 이 벙커에서 9타만에 홀아웃, 그러니까 한 홀에서 +5를 친 기록이 있다.


그런데 맥길로이의 10번 홀 벙커 샷은 환상이었다. 벙커에서 튀어나온 볼이 그린위로 구르더니 약속이나 한 듯 홀컵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아마 이번 150회 대회의 최고 명장면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우승과 상관없이 나에겐 맥길로이가 챔피언이었다.


벙커하면 우리는 우선 겁부터 먹는다. 골프 선생님들이 겁먹지 말고 공 뒤 5센치 정도를 정밀 타격하되 클럽을 짧게 잡고 백스윙을 크게 하고 팔로스루를 끝까지 하고. . 교과서대로 말해 주건만 막상 벙커에 빠진 공을 보면 저 모래속에서 과연 빼 낼수 있을까 두렵지 않은 골퍼가 많지 않을 것이다.


벙커란 무엇인가? 잘못 친 샷에 대한 응징, 혹은 그린 공략을 쉽게 할수 없도록 만든 장애물인 셈이다. 인생에도 올드코스의 항아리 벙커처럼 수많은 장애물이 있다. 잘 쳤다고 생각했는데 내 볼이 의외로 벙커에 빠져있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 찾아오는 그 낭패감.


요즘엔 코로나 벙커에 빠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도 한달 전 코로나에 감염되어 집에 갇혀 지내다 보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은근히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암이나 치매 벙커도 있다. 요즘엔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 벙커가 우리를 짓누르기도 한다.


이제 벙커에 빠졌을 때 나는 맥길로이를 기억하기로 했다. 두려워 말고 차분하고 자신있게 공략하기로. . . 인생길의 벙커 탈출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두려워 말라”는 말씀 붙잡고 가면 된다. 

 

<크리스찬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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