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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새해 첫날 한 살 반짜리 손녀가 세배를 했다. 

그냥 엎드리는 수준이었지만 손녀에게 세배받기는 내 생애 처음이라 기분 좋은 날이었다. 

그 손녀 손을 잡고 따라나선 곳이 그로브몰이란 샤핑센터에 있는 '반스 앤 노블' 책방이었다. 

아니 요즘에도 3층이나 되는 이렇게 큰 책방이 존재한다고? 

손녀는 자기 아빠 손을 잡고 일주일에도 두서너번 씩 여기에 온다고 한다. 

그러니까 손녀의 나들이 코스다. 

맨 꼭대기 층에 어린아이들 책과 장난감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책방을 어슬렁대다 대뜸 눈에 들어오는 책 하나가 있었다. 

'종교' 섹션에 꽂혀 있었다. 제목은 "Be a Nice Human." 열어보니 글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냥 백지였다. 

일기나 기도문 같은 걸 쓰는데 사용하라는 블랭크 북이었다. 

그런데 이 책 제목이 자꾸 내 마음을 잡아 끄는 게 아닌가? 

나이스한 인간이 되라고?

며칠 전 암 투병중인 한국의 이어령 교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에겐 '우리 시대의 스승', '한국 최고의 석학', '한국을 대표하는 천재'란 수식어가 붙는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죽음이 허무와 끝이 아님을 딸은 보여줬다"고 고백하며 세례교인이 되었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고 이민아 목사는 그의 딸이다. 

그 후 '지성에서 영성'이란 책을 펴내며 기독교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것을 우린 기억하고 있다.

그 이어령 교수가 지난해 송년 인터뷰에서 전 세계를 흥분시켰던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오징어 게임의 진짜 재미는 주인공 성기훈이란 사람의 성이 Saint로 해석되는 언어게임이라고 했다. 

바리새인 같은 종교인보다, 실수하고 못났지만 그래도 인간을 믿고 희생애를 간직한 성기훈이 가장 예수와 닮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도 그 드라마를 보면서 마침내 456억이란 최종 상금을 손에 쥔 주인공이 친구 어머니에게 돈 가방을 남겨놓고 가는 장면은 나에게도 짠한 감동이었다. 

게임장에서 만났던 탈북자 강새벽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동생을 보육원에서 꺼내 그 아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하며 친구 어머니에게 돈가방을 던져놓고 가는 그의 휴매니티. 

그런 그를 놓고 이어령 교수는 세인트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면서 '오징어게임'이 돈과 빚에 찌든 한국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했다는 비판에 대해 "밑바닥이 다 드러났지. 탈북자들, 이주 노동자들, 해고당한 사람들… 소외되고 짓밟힌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물어뜯잖아. 우리 속담에 '거지끼리 자루 찢는다'고 불행한 사람끼리 모여, 뺏고 뺏는 게임… 그 모습을 감추지 않았어요. 이 정도면 한국에 노동하러 오겠어? 악당들은 거기 다 있더구먼. 창피해서 살겠나, 싶겠지. 허허. 그런데 '나는 바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에요. '한국이 이런 나쁜 짓을 했습니다' 하는 순간 거기서 이미 벗어난 거야. 진짜 무서운 건 그걸 감추는 나라죠. 우리는 모순을 드러냈기에 자유로운 겁니다. 고해성사 같은 거죠. 자신을 고발하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면, 희망이 있어요. 결국 선이 악을 이기고 인간은 믿을 만 하다는 것, 세계인들은 그걸 보고 안도한 겁니다." 

그의 인터뷰는 "선한 인간이 이긴다, 믿으라!"는 말로 끝나고 있었다.

그분의 "선한 인간이 이긴다"는 말과 반스앤 노블에 꽂혀 있는 블랭크북 제목 "나이스한 휴먼이 되라"는 말이 하나의 느낌표로 포개지면서 새해를 맞는 내 가슴에 악수를 청해 오는 듯 했다.

코로나에 지쳐있는 판국에 또 오미크론까지 나타나서 그냥 짜증스러운 새해를 우리는 맞고 있다. 

그래서인가? 금년 새해엔 흔하게 입에 오르내리던 그 New Year's Resolution이란 말도 별로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새해 365일을 선물로 받은 이상 최소한의 선량한 삶을 살아내는 게 은혜받은 자의 기본 매너일 것이다. 

코로나 환란시대에 살아남아 여기까지 온 것이 사실은 눈물겹다.

비록 '인간말종'같이 보여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쟁취한 돈을 아낌없이 던져주는 따뜻한 인간애를 보고 그가 바로 성자라고 해석하는 우리 시대 스승의 말을 기억하자.

성자하면 우리는 성 베드로나 성 어거스틴만 떠올린다. 

그런 거창한 성자는 아니어도 지난해보다 조금만 더 나이스하게 변하는 인간이라면 그게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작은성자'가 아니겠는가?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성은 딱 2가지 말로 귀결될 수 있다. 

In Christ, 그리고 코람데오(Coram Deo).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하나님의 불꽃같은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신전의식, 아마 이 두 마디 말만 매일 까먹지 않고 살아도 우리는 넉넉하게 나이스 휴먼으로 살아갈 수 있다. 

너무 튀나게 변해보겠다고 벼르지 않아도 지난해보다 조금만 더 나이스하게...

그렇다면 충분하게 2022년은 '해피 뉴이어'가 될 수 있다. 

지난 한해 한결같이 크리스천 위클리를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밝아온 새해는 반드시 "해피 뉴이어!"

<크리스찬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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