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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끝난 본지 주관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마케도니아 지역이었다.


20여 년 전 이 지역을 여행할 때는 육로가 아니라 배를 타고 에게 해를 건너 터키에서 아테네로 직접 건너간 적은 있지만 이번엔 사도바울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도 방향을 튼 드로아를 거쳐 마케도니아에 첫발을 디딘 네압볼리, 즉 현재의 카발라 항구를 찾아 갔다.


빌립보, 데살로니가를 거쳐 방문한 곳이 바로 마테오라 수도원.


사실은 이 곳은 나의 버킷 리스트, 우리말로 ‘소망목록’ 중 하나였다.


그리스엔 아토스 산(Mount Athos)이란 세계유일의 수도원 공화국이 있다.


모든 것이 자치적이며 그리스와는 별도로 비자를 받아야 입국할 수 있는 반 자치공화국이다.
그리스 정부도 맘대로 못하는 이 아토스산에 사제와 수도사 3천여명이 살고 있는데 모두 성인 남성들 뿐이다.


금녀의 땅이다.


전성기였던 15세기엔 40여개의 수도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20개 정도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곳도 나의 버킷 리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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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스 다음으로 수도원이 많은 그리스 두 번째 수도원 마을이 바로 마테오라(사진).
거대한 돌기둥이 마치 숲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처음 이 곳을 보는 순간 뛰는 가슴을 진정하기 어렵다.


마테오라는 희랍어로 ‘공중에 떠 있는 마을’이란 뜻인데 얼마나 감동 그 자체였으면 맥아더 장군은 “마테오라를 보지 않고는 그리스를 다녀왔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


기독교박해를 피해 이 돌기둥 꼭대기에 숨어살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수도원으로 바뀌었다는 이곳엔 현재 6개의 수도원이 있고 그중 2개의 수녀원이 포함되어 있다.


꼬불꼬불한 수백미터 높이의 절벽을 버스를 타고 올라 관광객들에게 일정시간만 오픈하는 ‘발라암 수도원’을 방문한 것은 행운이었다.


이곳 마테오라의 정교회 수도사들은 하루 24시간 중에서 8시간은 기도와 묵상, 8시간은 노동, 8시간은 자신의 특기에 따라 성경필사, 나무 조각, 성화 작업 등을 하며 보낸다.


수도사들의 유일한 동무요 놀이기구는 꼼보스히니라고 불리는 묵주.
하루 종일의 삶이 거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청빈과 순종을 엄격하게 훈련하는 수도원, 여기서 나는 침묵의 영성을 보는 듯 했다.
우리시대 최고의 영성가로 알려진 헨리 나우엔은 참된 기도를 드리기 전에 우리는 침묵의 단계를 거쳐야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침묵은 우리를 늘 순례자의 길에 서게 한다.


사실 침묵을 거치지 않은 말은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에 불과할 뿐이다.
오랫동안 벼르고 별러 찾아간 마테오라 … 거기에 있는 것은 유명한 성화나 성경필사본이 아니라 빛으로 구별되거나 색으로 감지할 수 없는 고요한 침묵이 있을 뿐이었다.


마테오라는 침묵의 훈련장이었다.


그날 저녁 마테오라에서 내려와 호텔에 묵으면서 나는 아이패드로 뉴스를 훑어보았다.


서울의 광화문 광장에선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기독교도 그 광장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시대의 기독교는 그렇게 떠들고 외치면서 세상으로 몰려가는 광장의 기독교가 되어 버렸다.


섬김의 상징인 스톨을 어깨에 두르고 거리에서 떠드는 기독교, 웬만한 저질 정치인들의 속된 말을 서슴없이 애용하는 속물 기독교, 입을 열어 평화니 정의니 떠들면서도 위선과 거짓, 부도덕으로 도배질을 하면서 공산주의와 짜고 치는 고스톱을 즐기는 양 보이는 좌파 기독교, 툭하면 법정으로 달려가 상대방을 법으로 묵사발을 만들겠다고 벼르는 고발기독교, 패거리로 몰려다니며 자기만이 선지자요, 예언자인양 온갖 문자를 나열하며 떠드는 성명서 기독교, 이런 기독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황무한 세상에 전파될 수 있을까?


기독교에 침묵이 사라지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내 삶에 담아내기 위한 침묵, 시대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목말라 엎드리는 침묵, 자아의 부끄러움을 내려놓고 그분의 긍휼을 구하려 마주 앉는 침묵,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전혀 씻을 수 없는 교만 때문에 몸부림치는 침묵. . .
그러니까 마테오라의 기독교는 실종되고 광장의 기독교만 흥하는 시대에 우리는 거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교회가 수도원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교회를 팔아 세상의 이득을 취하려는 광장의 유혹도 경계해야 한다.


외침은 있으되 이기주의로 들리지 않게, 수도원에 오르되 비겁한 도피나 무관심으로 굳어지지 않는 우리들의 온전한 신앙적 직립보행의 자리는 어디쯤일까?


교회가 서야할 자리는 광장과 마테오라의 중간 어느 지점, 균형 잡힌 참여와 침묵의 자리 그 어디쯤이 아니겠는가?     


<크리스찬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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