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교회의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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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봉 목사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서 그 씨는 같은것일지라도 그 씨가 뿌려지는 토양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인류구원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선포되기 시작하여 예수님의 세우신 사도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 선교영역이 확장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구원의 복음을 수용하는 지역의 문화적인 배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게 되었거나, 교회들의 성장이 바람직하지 못하게 종교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 서로 분쟁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정죄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시대의 아시아지역은 세계4대문명발상지의 하나요, 하나님께서 먼저 유일신 하나님이심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였던 곳임으로 성경해석도 역사적인 해석에 주력하였지만, 당시의 유럽사회는 지금과는 다르게 우상숭배가 극심하였고, 태양신이나 여신숭배 사상의 영향이 많았음으로 성경해석도 우화적인(Allegorical) 해석을 하는 경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결과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말씀의 이해와 신학의 정립과 의식의 다른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도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주장하는 양성론(兩性論, Duophysite)과 신성을 더 강조하는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e) 주장이 다르게 나타났고, 성찬식도 기념설과 화체설로 해석하게 되었고, 특히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하여 아시아교회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으로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kos)라고 불렀지만, 서방교회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으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틴대제(Constantine the Great)가 AD313년에 신교자유령(信敎自由令, the Edict of Milan)을 반포한 후에 다민족국가인 로마제국이 기독교신앙으로 통일로마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는데 동서교회의 신학적인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 로마제국으 하나됨을 유지하는데 우려가 되었던 데오도시우스(Deodosius)황제는 국비로 AD431년에 에베소공의회(the Council of Ephesus)를 소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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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하는 필자


그런데 역사적인 기록을 보게되면 당시의 서방교회의 대표인 아렉산드리아 대주교였던 키릴(Cyril)이 자기들의 주장하는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황제의 신임으로 로마의 새로운 수도인 콘스탄티노불의 대주교로 임명받았고,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주장하였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아시아교회 대표로 인정되었던 것으로, 그와 주장을 같이 하는 아시아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하기 위하여 먼저 에베소에 도착하여 자기를만의 공의회를 열고, 네스토리우스와 아시아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습니다.
당시의 이단으로 정죄받는다는 것은, 정죄받은 사람은 신앙적인 활동은 물론 사회적인 활동도 못하게하여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사형선고나 같은 의미가 있는 결정인 것입니다.
몇일 후에 회의장에 도착한 아시아교회 대표들이 그 결과를 보고 아시아교회도 서방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음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이 세상을 이단들 뿐이도 정통교회는 없어진 것입니다.
후에 서방교회측에서 황제에게 많은 분량의 뇌물을 주어 황제로 부터 정통교회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에베소공의회 이전부터 동서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였지만, 이 에베소공의회의 결과로 동서교회가 완전히 분리된 것입니다.
로마제국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은 아시아교회는 이방종교세계인 페르샤와 아라비아 지방으로 도피행각을 시작하면서도 선교하여, AD503년에는 현재의 우즈베기스탄의 사마르칸드(Samarkand)에까지 대주교자를 설치하도록까지 성장하였습니다.
그 에베소공의회 후의 동서교회의 분립은, 그들의 신학이나 문화의 교류도 단절되었고, 아시아교회는 단독으로 공의회를 열었고, 서방교회의 성직자 독신제도도 거부하고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교활동은 순교와 희생의 길이였지만, 모두 자기들의 직업에 충실하면서 선교하는 자비량선교(自費糧宣敎)를 하여 생활신앙의 틀을 닦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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