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 마땅한 심판? 마땅치 않은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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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 목사

만나교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수많은 ‘악함’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어떤 이는 무기력한 하나님이 못마땅해 심판을 촉구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심판이 유보되기를 바란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이 양날의 검이 돼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함을 절대로 수수방관하지 않으신다. 단지 참으시고 유보하실 뿐이다.

누가복음 20장에 보면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로 알려진 말씀이 있다. 

이 비유의 관점을 조금 달리해 ‘자비로운 주인의 비유’로 보자.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아주 보편적인 ‘소작농 제도’가 있었다.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소작농에게 맡기면 소출이 날 때까지 4년 정도 소작료를 면제해 주지만 때가 이르면 주인이 종을 보내 소작료를 거둬들인다. 

다시 말해 ‘때가 이르면’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삶의 일상을 깨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개입하시는 순간이 온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거룩과 성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으시는 한, 자신만의 특별한 종교적인 구획 내에서 멋지게 지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불편한 방법으로 어떤 사건을 대면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보금자리를 휘저으신다.” 

지금 우리의 삶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포도원 비유에서 주인은 세 번씩이나 종들을 보내지만 악한 농부들은 그들을 때려서 쫓아버렸다. 

주인을 능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그들에게 행할 ‘마땅한 심판’을 유보하기로 마음먹는다. 

누가복음 20장 13절은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어찌할까.’ 법대로, 마음대로, 공의롭게 행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고민의 이유는 연민과 사랑으로 인한 미련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은 ‘마땅한 심판’ 대신 ‘마땅치 않은 은혜’를 베풀기로 결심한다.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면 아무리 악한 소작농들이라도 그를 ‘존대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주인의 모습이 참 무기력하게 보인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사용하는 대신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마땅하지 않은 은혜’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영화 ‘어벤져스’에는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지구를 지키는 영웅들이 나온다. 

만약 이런 초인적인 힘이 실제로 인간들에게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정의를 실현하고 악한 자를 멸하기 위해 힘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이 지구상에 남아 있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무기력함은 우리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여전히 존재케 하는 이유다. 

그러나 악한 포도원 농부들은 마땅한 심판이 유보되고 ‘마땅하지 않은 은혜’를 입었음에도 주인을 조롱하고 있다. 

주인의 아들을 죽이면 자신들이 그 포도원의 유산을 차지하리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살펴보고 나니, 하나님의 심판이 결코 무자비한 것이 아니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정의의 칼을 들지 않는 주인이 어리석게 보인다. 

사실 첫 번째 종을 죽였을 때, 농부들을 진멸했어도 주인을 악하다고 평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은 마땅하지 않게 여기고, 마땅하게 받을 수 없는 은혜를 누리면서 그것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은혜를 경험했다는 것으로 인해, 죄를 또 지어도 된다거나 은혜를 또 기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마땅하지 않은 은혜’를 경험했다고 방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앞으로 닥칠 무서운 심판의 예고편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초대하는 것이다. 

기억하자. 

악함을 심판하지 않는 것은 ‘무기력함’이 아니라 아직 유보하고 계신 ‘하나님의 침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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