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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교회 손경일 담임목사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이 말이 한국에서 한동안 꽤 유행했었습니다. 

원래 이 유행어는 한 영화에서 나온 사투리 대화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여 상황에 끌려,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해 살아가는 아빠를 향해 답답해하는 딸의 외침입니다.

여러분께 같은  질문을 한다면 무엇으로 답을 하겠습니까?

“뭣이 중헌디?”

사람은 평소 대화를 살펴보면 그 인생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임을 드러내게 됩니다.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입에 돈 이야기가 멈추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돈’인 셈입니다.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실수에도 자책이나 정죄를 쉽게 합니다. 

존재 이유에 치명타를 받기 때문입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내 삶에서 나오게 되있습니다. 

그것이 삶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그립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확한 이름은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이 사람은 사도 바울이 베스도 총독에게 심판받을 때 등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사람이 그 자리에 등장할 때 아주 재미있는 말을 기록합니다. 

바로 “위엄을 갖추고”입니다. 

그가 왕의 위치에 있으니 당연한 표현으로 여길 수 있으나, 한글로는 위엄으로 번역된 단어가 영어로는 “with great pomp”라고 번역하고 있다는 것입입니다. 

즉 화려하게 나타났음을 의미합니다.  

‘위엄’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환타시아’인데, 그 뜻은 ‘과시, 허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바른 심판이나 상황보다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아그립바'라는 것입니다. 

아그립바는 바울을 심판하는 자리에 함께했지만, 자신은 바울의 대해 판결을 내리는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그 상황을 총독 베스도에게 이야기해주는 역할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바울의 생사보다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즉, “자신의 화려함” 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아그립바'와 같은 인생은 지금도 참으로 많습니다. 

내가 중요합니다. 

한 사람은 사느냐 죽느냐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에게는 사람의 생명이나 삶보다 내가 세상에 어떻게 보여지고 있는지 혹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과장하고 꾸미는 데 익숙합니다.

요즘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월세를 살아도 좋은 차를 탄답니다. 

그 이유는 집은 사람들에게 안 보여주면 내가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없지만 차는 사람들이 볼 수밖에 없으니 차에 더 신경을 쓴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16장7절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습이 아닌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 또한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신앙의 모습이 아닌,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의 신앙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나타내기 원하는 환타지아를 싫어하십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겉의 화려함을 향한 삶이 아닌,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향한 매일의 삶에서의 주님과 동행하는 그 삶을 기뻐하십니다.

나의 오랜 신앙 생활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믿음의 경력을 내세우면 신앙의 겉치레를 꾸미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신앙은 하나님 눈에 보여지는 지금의 나의 중심, 나의 삶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이 좋게 여기는 모습을 하나님 앞에 보여지는 그 삶의 모습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요?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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